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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당 이만승 을 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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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은암공30세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8-06-03 15:32 조회2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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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槐堂公(괴당공) 휘 曼勝(만승, 1590~1659)

 

公의 휘는 만승(曼勝)이요, 字는 숙망(叔望)이며 號는 괴당(槐堂)이다. 선조 23년 경진년 1590년에 탄생하였다. 3세 때에 모친상을 당하고 5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천애의 고아가 되었는데, 선친인 백암공(栢庵公)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에 창궐하였던 의병활동을 하였는바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호남지방에 가시었다가 도망한 노비들에게 화를 입게 되어 거창에서 순직하였다. 公은 9세에 이르러 큰칼 한 자루를 만들어 숫돌에 갈고 닦음이 10년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낸 연후에 드디어 현장에 납시어 범인을 추포(追捕)하여 섬진의 두적강(豆赤江)에서 처단함으로써 선친의 원수를 갚고는 늦은 삼년상을 치렀으니 마치 초상 때와 같았다고 한다. 일찍이 문진사(文進士) 익창(益昌)과 이지봉(李芝峰) 종영(宗榮)에게서 수업하고 나중에 동계 권도(棟溪 權濤)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선친의 삼년상을 마치고는 세상일에 사절(謝絶)하고 낙동강 가에 관란정(觀瀾亭)을 짓고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후 고곡헌(古谷軒) 밖에 연못을 파서 그곳에 작은 배를 만들어 띄우고 사옹(簑翁)을 만들어 ‘渭川翁(위천옹)‘이라 이름 하였거늘 모두 감동하여 함께 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에 公은 사직의 위태로움과 선친께서 창의(倡義)하여 유지(有志)를 깊이 깨달은 고로 분연히 일어나 궐기를 한 바, 당시 감사(監司)가 조정에 이를 알림으로 9군․읍의 의병장으로 제수(除授)되어 전투현장인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에 이미 조정은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당한 이후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격문(檄文)을 지어 보내 항복의 부당함은 부르짖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그 후 대곡의 옥천대 위에 호연정(浩然亭)을 건축하여 날마다 성리학(性理學)을 강의 하였다. 중신의 천거로 1647년에 태능참봉을 제수(除授)받고, 선조 27년인 1649년에는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그리고 1650년인 효종 1년에 동몽교관 선공감 주부(童蒙敎官 繕工監 注簿)를 역임하고, 1653년에는 통훈대부 상의원 별제(通訓大夫 尙衣院 別提)의 벼슬을 받았다. 이후에 정승(政丞)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과 판서(判書) 오준(吳竣) 그리고 판서(判書) 갈은(渴隱) 유백증(兪伯曾)이 여덟 차례에 걸쳐 사간원(司諫院)에 천거(薦擧)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星巖精舍(성암정사)
은암공파 18세 괴당공 휘 만승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재실이다. 의령군 정곡면 오방리 321번지에 있다. 이곳은 괴당공이 부친 백암공의 원수를 갚고 난 뒤 낙동강 변에다 지었던 觀瀾亭(관란정)과 병자호란 화의 이후 신반의 옥천대 위에 세운 浩然亭(호연정)의 현판을 함께 걸고 있으면서 그 재각의 명칭은 인근 일곱 개의 고인돌을 칠성바위라 하는 데서 제하여 성암정사라고 하였다. 다행이 후손 휘 인기가 쓴 성암정사 중건사실기가 있으니 실어 전한다. 의령의 오방리에 성암정사라는 재실이 있는데, 우리 11대조 괴당선생 부분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부군께서 살아 계실 때, 관란정과 호연정 두 정자가 있었는데 그 때는 경산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3백여 년이 지났으므로 그 터를 확실히 증명할 수가 없다. 그 뒤 자손들은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아 각지에 흩어져 살았는데, 오방리에 사는 후손이 가장 많았다. 또 공의 체백이 묻힌 곳이 정동 문산이라 오방리와 서로 가까웠다. 재실을 수호하기 쉽고 또 제사지낼 때 재계하고 자는데 편리하기 때문에 여기에다 세웠다. 지난 해 을사(1965)년 창건하던 날에 여러 사람이 각자 힘에 따라 자금을 내었는데, 힘에 부쳐 새 재목을 쓰지 못하고, 7칸의 옛 집을 사서 4칸으로 줄였다. 규모가 대략 갖추어져 흠모하는 마음을 붙일 수 있었다. 재목이 옛날 것이라 단단하지 못하여, 해가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재실이 결국 무너졌다. 이에 종중의 논의가 세차게 나와 중건을 도모하게 되었고, 그 자금은 각 가구에서 돈을 내어 충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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