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王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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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王妃)

11世 | 우왕비 근비(謹妃)(도촌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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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3-19 22:05 조회8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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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우왕(禑王)의 왕비이신 근비(謹妃) 이씨는 도촌공의 손녀이며, 벽상산한삼중대광 문하시중 철성부원군  휘 림의 따님이시다.

  우왕 5년(l379) 4월에 왕비로 책봉되어 고려 마지막 국모(國母)로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사시었다. 여러대에 걸친 재상(宰相)의 가문이나, 충절과 덕행으로, 그리고 청백으로 그 이름이 일세에 풍미(風靡) 하던 명문가에서 개성부사(開城府事)의 고명딸로 태어난 謹妃께서는 엄한 가풍속에서도 부모의 따뜻한 자애와 주위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요조숙녀로 자랐으며 왕실의 간택(揀擇)에 의하여 입궁하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미모와 재덕을 겸비하신 출중한 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태평성대가 아니요 대륙에서는 원-명의 교체기로 혼란한 시기였으며 안으로는 원 나라의  핍박과 왜구(倭寇)의 잦은 왜침으로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공민왕 23년(1374)에 환관  최만생 홍윤 등에게 왕이 시해되는 비극적언 사건이 일어나는 등 혼돈의 시기였다.

  이러한 와증에서 왜구의 토벌(討伐)로 공을 세워 민심을 얻은 신홍 무신세력 이성계 일파들은 자기들의  야욕을 채우고자 왕실의 혈롱을 부정하고 왕위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려 하였으나 조정중신들이 명분론을 앞세워 정통성(正統性)을 주장하니 그들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전왕의 일점혈육인 우(禑)를 세우니 고려 32대 우왕으로 즉위 당시 10세의 중년(仲年)이었다.

  이러한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증심에서 국모로서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의연(毅然)함을 보이신 근비의 자취를 고려사에 나타난 기록들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조선조 문종 1년(1451)에 정인지(鄭麟趾) 등에 의하여 작성된 고려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기술된 역사서(歷史書)이며 특히 공민왕부터 이후의 기술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의 합리화를 위한 세심한 계획이 깔려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우왕 5년, 왕은 근비(謹妃)를 책봉하고 개성부사(開城府事)인 근비의 아버님을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할머니 성주이씨를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어머니 남양홍씨를 변한국대부인(弁韓國大夫人)으로 봉하였으며, 그 해 12월에는 왕께서 세분을 위로하는 연회를 궁중에서 베풀고 그 자리에서 근비의 어머니께 변한국대부인의 옥인(玉印)을 하사하시니 이는 비단 세 분의 광영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문의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우왕 6년(1380) 근비께서 아들을 낳으시니 上께서 “왕실을 반석(盤石) 위에 올려 놓았다.”고 기뻐하시며 ‘창(昌)’ 이라 명명(命名) 하시고 참형(斬刑)을 제외한 모든 죄인들을 방면하셨으며, 동왕 7년12월 임술에는 왕비의 생신을 맞아 참형(斬刑)·교형(交刑)을 제외한 모든 죄인들을 사면하시었다. 이로부터 8년 동안이 왕비의 일생에서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을 것이다.

  우왕 14년(1388) 5윌23일, 이성계는 압록강을 등지고 서서 “만일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하면 천자(天子)께 죄를 지어 나라와 백성에게 화가 당장 올 것이다”라고 외치면서 왕명을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 그들은 군사들로 하여금 궁궐을 포위하게 하고 임금을 겁박하여 강화도로 추방하고 새 임금을 세울 것을 논의하니 목은 이색(李穡) 등이 다사 명분론을 내세워 당연히 전왕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우왕은 왕씨의 혈육이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식이라’고 하던 이성계 일파도 어쩔수 없어 물러 섰다. 이 일에는 철성부원군 휘 림의 역활이 지대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이에 조민수(曺敏修) 등이 定妃(공민왕의 비)의 교지(敎旨)를 반들어 왕자 창(昌)을 옹립하니, 이 분이 고려 제33대 창왕으로 우왕의 일점혈육이요, 근비의 소생이다. 창왕은 즉위하자 어머님이신 근비 이씨를 대비로 높이고, 받들어 모시고 수창궁(壽昌宮, 고려의 正宮)으로 들어갔다.

  창왕은 즉위 다음해인 1389년 6월 철성부원군에게 문하시중을 제수하며 내린 교서(敎書)에서 “문하시증 이림(李琳)은 선대부터 나라의 중신으로서 오래동안 적덕(積德)을 많이하여 어머니를 낳아 上王) 배필이 되어 내치(內治)의 방조(傍助)가 있게 하였다. 내가 강보에 싸였을 제 질병이 많았는데, 그대가 마음과 힘을 다하여 보호하여 주었으므로 오늘날에 이르러 만백성에 군림하게 되었으니 그 공이 막대하다. 그는 세자의 지친(至親)으로서 대신의 직위에 이른 것은 결코 나의 사친(私親)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요, 실로 공론의 결과였다.”고 하였다. 상기 교서에서 “내치의 방조가 있었다” 고 한 것으로 보아 근비께서는 부덕(婦德)과 함께 국모(國母)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춘 여중군자(女中君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년 11월 전 대호군(大護軍) 김저, 전 부령(副令) 정득후, 예의판서(례儀判書) 곽충보 등이 우왕의 복위(復位)를 모의하였던 바, 곽충보가 동지들을 배반하고 이성계에게 밀고하니 이성계는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상왕(上王)을 강릉으로 옮기고 창왕(昌王)을 강화로 추방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었으며,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왕균(王鈞)의 아들인 요(瑤)를 세우니 이가 곧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이성계일파의 사주(使嗾)를 받아 동년 12월에 정당문학 서균형(徐均衡)을 보내어 상왕(上王) 우(禑)를 죽이고 예문관 대제학 유순(柳珣)을 보내어 창왕을 죽였다.

  이때 상왕을 모시고 있던 영비(寧妃) 최씨(최영의 딸)가 통곡하면서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아버지의 죄과(罪科)다”라고 하면서 10여일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 곡하고 울며 밤이면 반드시 우왕의 시신을 끌어 안고 잤으며 낟알(곡식)을 얻으면 절구에 성성껏 쓸어서 밥을 지어 상식(上食) 하곤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련히 여겼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영비(寧妃)의 정성과 애통이 이러하였을 제 소천(所天) 과 자식(子息)을 잃고 본결까지 쑥대밭으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근비의 마음을 다른 사람들이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요. 오직 국모로서의 위엄(威嚴) 마저 잃을 수 없어 손마디가 터지도록 주먹을 움켜쥐고 피눈물을 삭이시는 처연(凄然)하신 모습만이 눈에 선할 뿐이다.

  화변(禍變) 이후 우왕과 창왕 그리고 근비에 관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물론 능침(陵寢)도 조성하지 않았으리라. 고훼(枯卉, 마른 풀) 위에 촉루(髑髏, 유골)를 굴리지나 않으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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