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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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世 | 괴산공(槐山公) 휘 맥(陌, 1455~1528, 思菴公派)의 생애와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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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3-06 13:37 조회6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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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은 사암공의 제4자로 1455년(단종 3)에 나시어 字는 정보(井父)요 호는 괴산(槐山) 이며 규원(葵園)과 일십당(一十堂)은 公의 또 다른 호다.
20세에 진사가 되시고는 대과(大科)에 나아가지 않으시니 주위에서 권유하였으나 듣지 않으시고는 44세 되던 1498년(연산군 4)에 문과급제(文科及第) 하시니 그때야 비로소 공의 깊은 뜻을 알고 탄복하였다 한다. 그후 성균관(成均館)의 전적(典籍)이 되고 교서관(校書館)의 교리(校理, 서책이나 문서를 간행하는 관서의 종5품), 예조정랑(禮曹正郞), 종부시(宗簿寺)의 첨정(僉正) 겸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을 역임하시고 1503년(연산군 9) 49세에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이 되시었는데 당시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장숙용(張淑容)이 권세(權勢)를 이용하여 부정축재 하고 사택(私宅)을 지나치게 호화롭게 고쳐짓고 있으므로 이를 연산군에게 간(諫)하였더니 장숙용(張淑容)이 이에 반발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公과 오랫동안 싸움이 계속되자 연산군이 노하여 두분을 모두 유배(流配)시켰는데 공은 괴산(槐山)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후 2년이 지나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중종이 불러 유배를 풀고 사헌부(司憲府)의 장령(掌令)이 되시었으며, 왕명으로 경기도내에서 연산군의 폭정(暴政)에 의하여 입은 백성들의 피해조사를 담당(擔當)하였으며 그후 사복시(司僕寺)의 부정(副正, 궁중의 가마, 마필, 목장 등을 관장하는 관서의 종3품)을 거쳐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에 승진하시고 이어 승정원(承政院)의 우부승지(右副承旨,비서실의 비서관, 정3품)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이 되셨다가 다음해 검지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왕명의 출납, 병기, 군정, 경비 담당관서의 정3품)로 다시 공조참의(工曹叅議)가 되셨다. 그후 다시 사간원(司諫院) 의 대사간(大司諫)이 되시고 장예원(掌隸院)의 판결사(判決事),‘돈녕부(敦寧府)의 도정(都正, 왕실의 근친, 종친에 관한 사무담당관서의 정3품)과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종2품)로 특진 되시었다. 이렇듯 내외관직을 두루 거쳤으니 공무진행(公務進行)에 공정무사(公正無私) 하였으므로 백성들로 부터 숭앙을 받으셨다 한다. 1528년(중종 23) 10월 25일 세상을 떠나시니 수(壽)는 74세 이시었다.
야설(野說)에 의하면 안윤덕(安潤德), 고성열(高成烈), 임신겸(任申謙), 정수산(丁壽山), 이자겸(李自謙), 조원기(趙元紀) 등 어진 선비들과 교유(交遊) 하시어 기영회(耆英會)를 만드셨다 하며 평안북도 삭주지방 종인(宗人)의 소편(所篇)인 정해보(丁亥譜)의 심원록(尋源錄)에는 公의 시호가 충헌(忠憲)으로 기록(記錄) 되어 있으며 성상국(成相國) 성세창(成世昌)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묘는 성남시 도촌동에서 1990년 7월 충남 연기로 이장하였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여양진씨(驪陽陳氏) 이고 묘는 실전(失傳) 이고, 후배(後配)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는 부군묘와 쌍분(雙瓚)이며, 장자는 인(嶙, 군수), 2자는 구(嶇, 거창현감) 이시다.
公에 관한 금석문은 상국(相國) 성세창(成世昌)이 지은 신도비문에는 아래와 같은 명시(銘詩)가 세겨져 있으며, 묘전에는 월성(月城) 정동회(鄭東暉)가 지은 묘표문에 다음과 같은 명시(銘詩)가 있다.
《고성이씨는 명원(名園)에 뿌리를 심었도다.
향기롭게 열매 맺고 가지가 번성하도다.
문에 가득한 관작이요 난초같이 자라는 자손이로다.
公께서 마음이 밝고 바르시니 천부의 성정(性情)을 지녔도다.
어질게 어루만지니 일가 친척이 은혜에 감동하였도다.
외직(外職)으로 선정을 베풀고 옥사(獄事)를 해결하니 원망이 없었도다.
덕을 크게 베풀지 못했으나 은혜는 후손에 끼쳤도다.
80인의 여러 자손이 효의(孝義)가 더욱 돈독했도다.
公은 죽었으나 죽지 않은 것처럼 경사가 이에 더욱 성하도다.
울창한 저 광릉(廣陵)의 언덕에 묘소를 잡았도다.
나의 글을 이 비에 새겨 율촌(栗村)을 길이 지키노라.》
《固城有李植根名園 芬芳結實枝條寔繁 門盈珥貂蘭茁兒孫 我公諒直天賦性存
仁深撫育宗戚涵恩 刃遊盤鑽決滯無寃 德不大施惠遺後昆 八十諸孫孝義彌敦
公亡不亡流慶斯蕃 鬱彼廣陵靑島卜原 我銘斯石永鎭栗村》
 
《덕(德)은 충효(忠孝)를 갖추었고 벼슬은 가선대부(옳善大夫)에 올랐으며
80을 바라 보았으니 삼달존(三達尊;덕(德),치(齒),작(爵)이 구비하였도다.
가만히 고금을 살펴 봄에 公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 때문에 방휘(芳徽)가 끝없이 전하리》
《德有忠孝 爵嘉嘉善· 齒且望八 三達具盡 默數今古 如公者幾 歌以芳徽 傳之无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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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휘 陌의 묘 (충남 연기군 서면 두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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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휘 陌의 신도비 (충남 연기군 서면 두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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