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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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세덕

13世 | 청파공(靑坡公) 휘 육(陸, 1438~1498, 思菴公派)의 생애와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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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3-06 13:21 조회5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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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공의 장남으로 1408년(세종 20) 4월 16일에 나셨으며 字는 방옹(放翁)이며 호는 청파(靑坡)이고 시호가 문광(文光)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시어 기품이 호탕하고 의협심이 강했으며 배움을 즐기시며 덕(德)을 숭상하였는데 1459년에 진사가 되시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3년간 학문을 탐구하며 요산요수(樂山樂水) 하시니 그때 공을 찾는 문하생(門下生)이 운집하였다. 그러던 중 1464년 봄 세조께서 온양에서 전시(殿試, 왕이 직접 시행하는 과거) 하실 때 응시하여 수석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직강(直講, 정5품, 교수)이 되시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 문무관에게 임시시험으로 34명 합격시킨 과거)와 1468년 문과중시(文科重試, 과거에 합격한 당하관에게 보이는 시험)에 합격하고 세자 시강원(侍講院)의 문학(文學, 정5품)과 종학원(宗學院)의 사회(司誨, 교수, 정5품)를 거쳐 예문관(藝文館)의 응교(應校)가 되셨다가, 예종이 즉위하자 사헌부(司憲府)의 장영(掌令, 정4품)을 거쳐 예문관(藝文館)의 전수(典輸, 종3품)가 되시고, 성종 즉위에 공을 세워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의 호를 받고 절충장군(折衝將軍) 대호군(大護軍)이 되셨으며 장예원(掌隸院)의 판결사(判決事, 노비에 관한 문서와 송사를 재판하는 기관의 판사)를 거쳐 성균관(成均館)의 대사성(大司城, 학장격)이 되시어 장시사(掌試士, 고시책임자)를 맡으셨으며 당시 조지서(趙之瑞), 신종호(申從濩) 등 200여 현사(賢士)를 뽑으니 득인(得人)의 칭송을 받으셨다,
그 후 다시 장예원(掌隸院)의 판결사(判決事)가 되시니 당시 영의정 신숙주(申叔舟)가 이모(李某)는 학문과 경륜이 있는 인재이므로 사무직보다 경륜을 펼 수 있는 행정관으로 보냄이 좋을 것이라 아뢰니 왕께서 옳다 하시고 공조참의(工曹叅議, 정3품)를 제수했다가 1477년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시니 그때 부친인 思菴公이 괴산군수로 계셨으므로 부자간에 직책이 上下가 바뀌어 어려움을 겪게되자 왕이 이를 아시고 사암공을 중앙의 관서로 옮기게 했다. 그후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의 참의(叅議)를 두루 역임하셨다. 이때에 나라 안에서 송사 처리가 밀려 단송도감(斷訟都監, 재판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기관)을 설치하여 공이 제조(提調, 종2품)를 맡으시어 널리 학문과 물정에 통달하시고 천성민달(天性敏達) 하신 인품으로 공정 신속하고도 훌륭하게 처리 하시었다.
1484년에 형조참의(刑曹叅議)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시어 다시 지방 목관(牧官)으로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한성부 우윤(右尹)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觀察使), 예조참판(禮曹叅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 府使),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셨는데 많은 서책과 학문에 깊이 통달하시고 왕조세계(王朝世系, 왕실족보)에 대해서 누구도 따를 수 없을만큼 박통(博通)하시니 당시에 유명한 선비들이 모두 탄복했다고 한다. 그후 경기도 관찰사(觀察使), 사헌부의 대사헌(大司憲), 한성부 좌윤(左尹), 호조참판, 병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同知春秋館事, 기록문서를 관리하고 역사에 관한 기록을 담당하는 관서의 정2품)로 성종실록을 영수(領修, 미리 편찬하는 일) 하셨다.
公께서 세조 임금때 인지의(印地儀)라는 측량기를 발명하시어 세조께서 김유(金紐)와 강희맹(姜希孟) 등을 불러 친히 설명을 하시고 궁중 후원에서 이를 시험해 보시고는 노래까지 지어 창제(創製)를 축하하셨다 하며, 영릉(英陵)과 서울의 지리를 측량하게 하셨다. 이 인지의(印地儀)는 현재 중앙기상대에 보존중에 있다. 한편 풍류에도 초범(超凡)하시어 명승절경을 많이 탐방하셨는데 강릉 해안 기암(奇岩)이 있는 곳을 자주 찾으셨는데 당시 학덕 높은 정승 허종(許琮, 상우당 우의정, 양천부원군)과 이곳에서 시유(詩遊) 하시어 훗날 이곳을 가리켜 허리대(許李臺)라 전래되어 오고 있다. 또한 중국 천자(中國天子)로부터 백옥적을 하사 받으셨다. 그리고 선조 행촌, 평재. 용헌 3세의 문집인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과 팔촌도(八寸圖)를 편집 출간하시어 우리 고성이씨의 족보편집에 첫 근거가 되게 하셨으며 공의 견문을 수록한 청파극담(靑坡極談)을 저술하셨다, 또 공의 문집으로 1512년(중종 7)에 公의 둘째아들 험(嶮)께서 편집하여 시(詩), 예착(睿鑿), 기실(記實), 척이(摭異), 도량(度量) 등 15류(類)로 된 청파문집(靑坡文集)이 있는데 백옥적과 문집목판은 현재 국립진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렇듯 정치(政治), 문학(文學), 그리고 박학(博學)으로 명성을 떨치시었다.
1498년 3월 17일 세상을 떠나시니 수(壽)는 61세 이시다. 묘는 경기도 광주시 목동 산113번지 용헌공 묘 계하(階下) 자좌(子坐)에 배위 정부인 고령박씨와 합폄이고, 후배(後配) 정부인 경주김씨는 부군묘 우측에 안장하였으며 아들로 장자는 이(峓, 한성판관), 2자는 험(嶮, 군수), 3자는 엽(嶪, 증 承旨), 4자는 교(嶠, 증 병조참판) 이시다.
공에 관한 금석문 중 용재 성현(成俔)고이 지은 신도비명에 다음과 같은 명시(銘詩)가 세겨져 있다.
 
《철성(鐵城)의 李氏는 나라의 대성(大姓)이로다.
혁혁한 여러 현류(賢類)가 대대로 그 여경(餘慶)에 독실했도다.
마침내 公에 이르러 우월한 덕행이 있었도다.
관직에 임하고 일을 당하여 그 바름을 잃지 않았도다.
효우(孝友)와 공각(恭恪, 공경함)을 천성으로 타고 났도다.
문사(文辭)가 크게 드러나 마음과 솜씨가 서로 응하였도다.
담론(談論)이 하수(河水) 같아 아무도 더불어 겨룰 수 없었도다.
정확하고 명백하게 비추니 사물이 거울에 도망을 못하였도다.
그 형옥(刑獄)을 다스림에 먼저 오청(五聽)을 분별하였도다.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충언(忠言)으로 간쟁(諫爭) 하였도다.
4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가니 선정에 다 감복하였도다.
6조(六曹)를 두루 역임함에 울연히 명성이 있었도다,
경륜(經綸)의 큰 솜씨로 마땅히 국가의 정사를 맡을 것인데
어찌 넉넉한 그 덕의(德義)에 그 수명(壽命)은 인색했던가?
선경(善慶)을 쌓아 명문으로 창성하였도다.
높다란 큰비가 있으니 보는 이는 공경할 마음이 일어나리라》
《鐵城之李 爲國大姓 赫赫諸賢‘世篤其慶 乃至於公 優有德行 莅官莅事 不失其正
孝友恭恪 自出天性 文辭苕發 心手相應 談論顯河 人無與競 精明所照 物l莫逃鏡
其理刑獄 先辨五聽 其受言責 忠言有諍 出按四道 咸服善政 歷揚六部 蔚有聲稱
經綸大手 宜付國炳 何富之德 而嗇其命 善慶所積 門關轉盛 有巋豊碣 瞻者起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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