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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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世 | 좌랑공(佐郞公) 휘 명(洺, 叅判公波)의 생애와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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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3-06 13:20 조회5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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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 낙향하신 叅判公 휘 증(增)의 제3자로 字는 호원(浩源) 이며 임청각을 지어 명문가의 터전을 닦고 절도있는 언행으로 고을내에서 명성이 높았다.
성종 17년(1486) 김일손, 권오복과 사마시(司馬試)에 함께 합격하고 선조의 음덕으로 벼슬에 나아가 형조좌랑(刑曹位郞)이 되었으나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에 조카인 망헌공(忘軒公)이 처형되고 온 집안이 화를 입게되어 公은 영덕에 유배되고 형인 낙포공 휘 굉(浤)은 영해에 유배되였으며, 당시 많은 인물이 사화(士禍)의 피해를 면치 못할 때였다.
중종반정후 1506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의흥현감으로 재임중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많았다, 중형 개성 유수(開城留守) 낙포공(洛浦公)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편안하게 사니 公도 관작을 헌 신짝과 같이 버리고 돌아와 임청각(臨淸開)을 짓고 편안하게 지내니 도연명(陶淵明)의 임청류이부시(臨 淸流而賦詩)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당시 장덕군자(長德君子)들은 중국의 이소(二疏, 疏黃, 疏受)의 고사에 비겼으니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선생은 “소년쟁자설귀전 만세의위지불전 백수강정형급제 환성명절일가전(少年爭自說歸田 晩歲依違志不專 自首江亭兄及弟 宦成名節一家全) 이라고 찬미하였다.
公이 성종 18년(1487)에 창건한 임청각 군자정은 영남산을 등지고 앞으로 낙동강을 안고 흐르는 배산임류(背山臨溜)의 넓은 집으로 우측 전방에 반변천이 합류하며 동편대안에 무협산이 정답고 강건너 저편에 문필봉, 낙타산 연봉(連峰)이 수려하게 이어지니 그 아름다운 풍경은 화산제일경(花山第一景) 이요 또 이 군자정은 안동에서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일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특이한 구조의 건축양식으로 대한민국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었으며, 임청각은 창건 당시 민간인으로서는 최대 규모인 99칸을 건축하여 문루까지 있는 영남 선비가문의 대표적인 건물이고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현재 남아 있는 칸수는 70여 칸이다.
임청각의 특이한 건축방식은 문간방이 없는 것이고 본채는 일(日) 字와 월(月) 字가 합쳐진 용(用) 字 형으로 천지의 정기를 화합하는 풍수적 방위설로 건축한 것이다. 본채 동북쪽에 세분의 재상이 태어난다는 방이 있으며 좌의정을 지내신 약봉 서성(藥峯 徐渻), 낙파 류후조(洛坡 柳厚祚)는 외손으로서 이 방에서 태어나셨고, 친손으로서는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國務領)이신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이 집 종손으로 이 방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 방 앞뜰에는 영천수(靈泉水)가 나오는 우물이 있었으며 그 물맛이 널리 알려져 있다. 전후좌우의 강산 토지는 타인 소유가 없었으며 480년간 20대를 맏이로 계승하고 역대로 비범한 인물이 탄생하였으며 선조 임금도 하고싶어 하였다는 안동좌수도 이 집안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었음은 사림(士林)들도 시인하는 바이다.
이러한 명당에 웅장한 임청각이 50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번의 전쟁을 겪고 특히 일제말에는 석주(石洲)선생 관계로 사상가의 집이라고 왜정에 몰수되어 노무자합숙소로 본채를 개조하여 사용하여 왔기 때문에 매우 허물어져 있는 것을 온 종중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1966년에 군자정을 제외한 모든 부속 건물 및 담장 등 일체를 문화재로 지정 신청하고, 투지로서 각계에 자료재출 및 설득으로 보물 제182호로 편입지정을 받아 당시로서는 거액인 약 5000만원의 보수비를 들여서 임청각 전 건물을 완전 해체하여 신축 하는 비용보다 더한 공사를 3년간 년차 공사로 담장까지 완전하게 마치니 만 10년만에 오직 집념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 군대가 이 임청각에 주둔하였고 군자정에 의병대장 고경명, 백사 윤헌, 농암 이현보, 서애 류성룡,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 현인달사(賢人達士)들이 읊었던 시판(詩板)이 명성을 말해 주며, 안동 고성이씨의 상징으로 매년 여러차례의 모임과 외래 관광객의 방문이 끊이지 아니한다.
公의 묘는 안동시 예안면 미질리 수다산에 배위 숙부인 남평문씨와 쌍분이며 장자는 요(曜, 문과, 군수), 차남은 승(勝, 군수). 3남은 반(胖, 문과, 군수), 4남은 주(腠, 무후), 5남은 고(股, 군수), 6남은 굉(肱, 禮賓寺 別提) 이시다.
公의 묘표문(墓表文)은 공의 16대 손 승규(承奎)가 지었으며, 임청각공 휘 명(洺)과 공의 6자인 반구옹 휘 굉(肱), 손자인 어은공(漁隱公) 휘 용(容) 등 조자손(祖子孫) 3세가 모두 관작을 버렸으니, 그 맑은 표정과 높은 절개지킴을 칭탄(稱歎)하는 고성이씨삼세유허비(固城李氏三世遺墟碑)에 풍원부원군 조현명(趙顯命)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조선 중엽이후 선비의 등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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