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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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世 | 정숙공(貞肅公) 휘 칙(則, 1438-1496, 左尹公派)의 생애와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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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3-06 12:30 조회6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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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의 휘는 칙(則), 字는 숙도(叔度), 호는 죽계(竹溪) 이며, 시호는 정숙(貞肅) 이시다. 좌의정(左議政)을 하신 용헌공(容軒公)의 손자이고, 한성부 좌윤(左尹, 서울시장격)을 하신 좌윤공(左尹公) 휘 질(垤)의 둘째 아드님으로, 세종 20년(1438)에 태어나시었다.
公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인품이 뛰어나고 학문을 즐겨, 여러 서책에 통달하시고 19세 되던 세조 2년(1456)에 진사시에 급제하셨으나, 그 후 주위에서 권하여도 과거를 보려 아니하시다가 25세 세조 8년(1462)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여(李荇 撰, 자헌대부 정숙이공 묘갈명) 장흥고 직장(長興庫 直長, 종7품)을 시작으로 병조좌랑(兵曹佐郞), 병조정랑(兵曹正郞, 정5품)을 거쳐 의정부 검상(儉詳)으로 있으면서 세조실록을 수찬(修撰)하여 상으로 향표리(두겹옷) 1습을 하사 받았다.
성종 6년 1월 25일 임금이 친히 동대문 밖에 단을 설치하고 선농제(先農祭)를 지낼 때에 公을 선농제 축사로 임하시고 한 자급(資級) 승진을 하여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셨다. 성종 6년 5월 16일 일본국 통신 부사로 임명되었는데 영의정 정창손, 좌의정 한명회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칙(李則)은 재간(才幹)과 기도(器度)는 보통 사람이 아니나, 다만 오른 팔이 병이나 능히 굽히고 펴지를 못하니, 외국에 사신으로 삼기에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여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된 일이 있다.
공은 성종 7년 11월 중궁(中宮)의 고명을 받기 위한 주청사(奏請使) 심회(沈檜)를 수행하여 연경(燕京, 북경)에 갔다가 성종 8년 2월에 돌아와서 전답 8결을 하사 받고 성종 8년 2월 9일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通訓大夫 司憲府 執義, 종3품)에 올랐다.
公은 성종 9년 3월9일 임금에게 아뢰기를 ”양노연(養老宴)에 문신(文臣) 노인만을 참여시킴은 문무(文武)가 본래 다른 길이 아니므로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관(武官)은 훈련원과 도총부뿐인데, 도총부 단청에는 문신만을 등용하여 부장(部長)은 모두 무신이 아닙니다. 열무(閱武)때 이르면 문신들이 군사일에 익숙하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도총부 및 부장은 청컨대 문신, 무신을 서로 반씩 제수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조로 하여금 이러한 뜻을 알려서 관원을 임명할 때 문관은 이조에서, 무관은 병조에서 각각 후보자를 올리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성종 10년 4월 일본 통신사 이형원의 선위사(宣慰使)로 일본에 갔다가 그 해 10월 5일에 돌아와서 통정대부 형조참의(通政大夫 刑曹叅議,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성종 11년(1480) 8월 15일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이어 전라도 관찰사 부임을 명받았을 때, 성균관 유생 200여명이 글을 올려 유임을 청하였는데 그 글에는 ”이칙(李則)은 유림의 모범이요 도학의 종사(宗師)이니, 지금 외직으로 나가면 한 지방의 백성들은 바로 은혜를 받지만, 이 나라의 선비들은 어디가서 덕을 배우겠습니까” 하니 임금께서 답하시기를 ”그대들의 말이 옳기는 하나 감사(監司, 도지사)의 임무를 가볍다고 생각하는가? 풍속을 바로 잡는 일이 어찌 무겁지 아나한가. 가르치고 키워 나라에 모자라는 사람이 없게 하고자 한다. 어진 정치로 덕을 베풀기 위하여 公을 관찰사로 내 보냄이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답을 내렸다. 이를 보아 임금께서 公을 얼마나 아끼고 중하게 여기셨는지 능히 짐작되며, 유생들이 청한 대로 되지 못하매 모두 公의 집에 가서 예를 차려 인사드렸다 한다(용재집). 公은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참의, 이조참의를 역임하셨다.
公은 성종 17년(1486) 11월 동부승지(同承旨)로 발탁되고, 이어서 우부승지(右部承旨), 좌부승지(左部 承旨)를 거처 성종 18년 7월 가선대부(嘉善夫大, 종2품),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올랐다. 4촌 매부 여희령(呂希寧)을 진도 군수로, 5촌 조카 이이(李峓)를 평구찰방으로 삼았는데, 이 인사는 ”경험없는 가까운 친척을 순서를 뛰어넘은 정실 인사이다” 라는 사헌부의 거듭된 탄핵을 받고, 이조참판을 사임하시었다.
성종 19년(1488) 10월 3일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다시 제수 받고, 경연장에서 임금이 公에게 말하기를 ”내가 임사홍(任士洪)을 쓰고자 하는데 어떠하겠는가.” 하심에, 公이 대담하기를 ”임사홍이 오늘 등용되면 국가에 화를 끼침이 명일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하여 임사홍의 등용을 막았다. 연산조에 이르러 ”임사홍은 임금을 잘못 인도하여 잔악한 짓을 하게 하여 선량한 이를 잔해하고 생명을 어육으로 만들어 종사가 거의 기울었으니 이칙(李則)의 말이 이에 이르러 과연 정험 되었습니다” 라고 홍문관 부제학 이자견이 중종에게 아뢰였다고 한다.
성종 19년 11윌 대사헌 이칙(李則)과 5명이 상소에 이르기를, 첫째 풍속을 두텁게 할 것, 둘째 대체(大體)를 보존 할 것, 셋째 사명(辭命, 말)을 간결히 할 것, 넷째 언로를 열 것 등이었는데 대부분 절실한 말이었다. 임금이 친서를 내려 기리고, 公에게 표피(豹皮)와 난모(煖瑁)를 하사하였으며, 또 김미(金梶) 이하 5명에게 서피(犀皮)와 난모를 하사하였다. 公과 김미 등이 착용하고서 사은하니 임금이 선온(宣醞, 하사주) 하고, 다시 백랍촉(白蠟燭) 5자루씩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옛날에 어전의 금연촉(金蓮獨)을 거두어서 학사(學士)를 전송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 경들에게 이 초를 하사하는 바이다. 각각 책상 앞에 놓고 한껏 마시고 한껏 즐기도록 하라.” 하였다.
公 등이 술에 취하여 상전(尙傳)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이와 같으신데도 요순(堯舜)의 정치를 이루지 못 하는 것은 신들의 죄입니다” 하였다. 술자리를 파하고 나니 한밤중 이었다.(국조보감 17권 186면)
公은 성종 20년 2월 신준, 노공필, 이서 등이 모역(모의 반역)했다는 김방의 변고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구속되고, 이미 세 사람이 숨지는 사실을 보고, 公은 그 내용이 무고함을 세세히 논하여 구속된 무리를 석방할 것을 서면으로 주청하여 사건 수습의 길을 열었는데, 그때 사관(史官)이 논평하기를 ”이때 대신들이 무고임을 알았으나 일이 악역(惡逆)에 관계됨으로서 발언하기 어려웠는데, 公이 마음으로 그 억울함을 불쌍히 여겨서 서계(書啓)로 아뢰였으니, 이른바 언관(言官)의 책무를 저버리지 아니하였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성종 20년 다시 대사성으로 갔다가 충청도 관찰사를 제수 받고, 사조(辭朝; 부임인사) 하는 公을 인견
한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이(利)를 일으키고 해(害)를 제거하는 일을 익숙하게 할 것이다”
라고 이르시니, 공은 ”민생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군수)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달려있으니 감사(도지사)가 밝게 살펴서 수령으로 하여금 백성을 학대하지 못하도록 하며 백성이 원하는 것을 살피는데 정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아뢰였다.
公은 성종 23년(1492) 2월 7일 임금에게 아뢰기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 김종식은 본래 청빈한 사람이고, 지금 그 집에는 약을 다릴 숯조차 없다고 합니다. 김종직은 고향으로 내려간 후 스스로 벼슬자리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녹봉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청컨대 받지 않은 녹봉을 모두 헤아려 소재관으로 하여금 보내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좌우에 물어 그대로 따랐다. 같은 날 경상도 관찰사 정승조에게 하서 하기를 ”지중추부사 김종직이 밀양의 촌가에서 병을 요양하고 있는데, 그 생계가 본래 청빈하니 음식물을 갖추어 주게 하라.” 하였다.
성종 23년 5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서 선정을 행하였고, 성종 25년 5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내직에 들어와 병을 얻어서 같은 해 8월 발령된 정조사(正朝使)를 사직하고, 연산군 2년(1496) 여름 4월 신묘일에 수 59세로 돌아가시니 공은 도(道)로 동요하지 않으므로 직도불요(直道不橈) 정(貞)이고” 마음을 지켜 집심결단(執心決斷)하니 숙(肅) 이라 하여 시호를 정숙(貞肅) 이라 하였다.
왕조실록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논하기를 ”公은 뛰어나게 큰 절조가 있고, 뜻이 넓게 틔었으며, 처신과 남 대하는데에 모난 적이 없었으며,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으되. 살림은 벼슬하기 전 청빈할 때와 같고 집에는 청탁하려 오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公의 배위이신 정부인 안동권씨(貞夫人 安東權氏)는 좌의정 복(復)의 손녀이며, 호조랑(戶曹郞) 온(溫)의 딸로 부군(公)을 지극정성으로 받드는 현명하고 유순한 부도(婦道)를 갖추었으며, 공이 돌아가심에 여묘(廬墓)하여 삼년상을 지내시며 삭망(朔望) 때 반드시 전(奠)을 받들어 정성을 다 하였다. 25년 후에 돌아가시니 壽는 77세였다.(이행 찬 ; 자헌대부 정숙 이공 묘갈명)
아들 줄(茁)은 광주목사(光州牧使), 분(蕡)은 홍양현감, 내(萊)는 안변부사, 옹(蓊)은 세자익위사 부장(世子翊衛司 部將), 요(蕘)는 군수이며, 사위 권주(權柱)는 예조참판(안동인), 박(朴)는 현감(!縣藍, 潘 南人), 신홍좌(弘佐)는 참봉(叅奉, 거창인)으로 모두 5남 3녀를 두셨다.
1496년 4월에 향년 59세로 별세하신 정숙공과 1521년에 별세하신 정부인 안동권씨는 정숙공께서 장전(莊田)으로 관리해 오던 인천 화수동 37-2에 안장되었으나, 1936년 7월 인천시의 도시 학장계획에 따라 묘역을 정숙공의 증손자인 희(曦)와 돈(暾) 형제의 묘소가 있는 인천시 서구 석남동 산 50번지로 천묘하게 되었다.
1970년 5월에 인천시가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석남동의 묘역마저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재연(26세) 이름으로 명의신탁 되어있던 그곳 종중산과 임야를 매도한 후, 김포군 검단면 당하리 산164(현 인천시 서구 당하동)에 종중산 임야 6,660평을 대토로 매입하여 정숙공 묘소와 옹(蓊, 병사공파), 변(忭, 蓊의 子), 성(性) 세 분의 묘소를 함께 다시 천묘하였다.
정숙공의 장자인 광주목사 줄(茁), 목사를 지낸 손자 응(應),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증손 보(保) 3대의 묘는 충남 보령군 주산면 화평리 산 2-1에 묘셔져 있다.
후손들이 정성어린 위선심을 발휘하여 2회에 걸친 천묘로 정숙공과 그 후손들이 함께 모셔져 있는 인천시 당하동 묘역에는 용제(容濟) 이행(李荇)이 지은 묘갈명에 다음과 같은 명시(銘詩)가 새겨져 있다.
 
《이미 크게 번성한 철성의 이씨 가문이로다.
밀직공이 후손을 두었으니 이르되 행촌(杏村)이시다.
젊은 나이에 등용되어 지위가 높고 명망이 높았도다.
문경공(文敬公)이 이어시니 용헌(容軒)을 낳으셨도다.
대대로 빛난 높은 벼슬, 날개를 떨치어 높이 올랐도다.
소윤공이 복을 쌓아 후손에게 전하드니 아름답다.
정숙공께서 능히 선업(先業)을 이었도다.
높다랗고 깊음이 큰 뫼와 같고 큰 물과 같았도다.
선민(先民)의 말과 같이 그 처음을 반드시 회복하였도다.
사람들은 발을 들어 기다렸으나 공은 빠름이 없었도다.
한가히 지내면서 학문을 닦아 곡식의 익음과 같았도다.
누가 쌓아 베풀지 않고 누가 먹지 않았는가?
대과에 급제하니 나라의 영광이었도다.
아름다운 그 용모도 날랜 그 강직이로다.
사헌부 대사헌으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았도다.
항소를 조야(朝野)가 경청했으니 입은 괴로웠지만 오직 어질었도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재직 중 선비들이 물밀 듯 모였도다.
일경(一經)을 가르쳐줌에 마침 빛을 보게 되었도다.
유생들이 유임을 청했으니 옛적에 들은 도주(道州)이로다.
거듭 쉬지 않았으니 공의 덕이 우월함이로다.
좋은 평판과 좋은 명망은 조정에 높았도다.
큰 공훈은 주상(主上)을 감동시키어 후손들도 그 음덕을 입었다.
길이 부역을 정하지 않았으니 자손의 광영이로다.
후손이 다함 없으리니 이 명장(銘章)을 볼지어다》
공의 후손들은 정숙공 생전의 장전(莊田)을 잘 수호
유지하면서 고성이씨좌윤공파정숙공종중을 운영하고
모두가 단합하여 합리적인 종중관리와 시향과 유업
계승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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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貞肅公 휘 則의 묘
(인천시 서구 당하동 산 16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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