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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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세덕

13世 | 감사공(監司公) 휘 절(節)(1411-1462, 護軍公派)의 생애와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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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3-06 12:25 조회3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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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의 휘는 절(節)이요 호는 초당(草堂)이니 호군공(護軍公 휘 谷)의 아드님이시다. 1411년에 태어나시어 어려서부터 총명하시고 단엄정직(端嚴正直) 하시며 역학불권(力學不卷) 하시었다. 1426년에 문과급제하시고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1450년에 전라감사를 역임하여 선정을 베풀어오다가 단종이 왕권을 빼앗긴 후 원통함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남하하여 나주에 이르러 주초복거(誅草卜居, 풀을 베고 새로 집터를 정하여 거처하는 것) 하고 그 마을 이름을 초동(草洞)이라 했다. 그 후로 이곳 초동에서 살게되었으니 감사공은 고성이씨 나주 입향조 이시다.
일찌기 公께서 은거중에 혼탁한 세상을 탄식하며 지은 시(草洞述懷)에 담긴 내용만 보더라도 公의 맑고 곧은 지조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세상이 나의 뜻과 어그러졌으니 늙음을 어쩌나! (世我相違奈老何)
갈매기 나는 강물에 빈 배를 띄우도다 (伴鷗江上泛虛舟)
붉은 충성심은 오히려 단종시대를 생각하거니 (丹心猶戴莊陵日)
국화꽃에 찬이슬은 아직도 벼슬을 버리는 기개가 남아 있도다.(菊露尙餘彭澤秋)》
1462년에 서거하시니 전남 나주군 다시면 초동 뒷산 식적동에 장례로 모셨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여산송씨와 정부인 나주정씨 이시고 장자는 백안(伯安, 참봉), 차자는 궁려(躬慮), 3자는 궁신(躬愼), 따님은 최순(崔淳, 隋城人) 경차관(敬差官) 이시다.
公의 서거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청명(淸名)과 직절(直節)이 청사(靑史)에 실려 민멸(泯滅, 흔적이 없어짐) 되지 않았으니 公의 유덕(遺德)을 추모하며 유적(遺跡)을 보존키 위하여 초동 뒷산의 식적동에 公의 유허비(遺墟碑)를 건립하였으며, 오위도총부 부총관 서정기(徐正淇) 선생이 지은 묘비명(墓碑銘)에 다음과 같은 명시(銘詩)가 새겨져 있다.
 
《고성이씨는 빛나는 공훈이 대대로 혁혁한데
고려말과 조선초에 나라의 기둥이요 초석이었네
아름다워라 초당이여! 문채와 바탕을 갖춘 풍격으로
성현의 글을 읽어 공경심을 가지고 풀지 않았네!
가정교육이 집에 전하니 우애하여 순조롭게 나아가고
홍범(한나라 우왕)의 정치도의가 나라에 있거니 충성과 의리는 나의 책임,
문종이 아들을 염려하였고 세종이 손자 걱정하여 선덕 쌓았거늘
갑자기 정변을 만나 단종이 자리를 잃었다네,
단종이 청령포에서 돌아가신 날 사육신이 노량진에 묻힌 저녁
자규는 울어서 피를 토하고 두견화가 붉게 피었다네.
때를 보고 움직인다는 것 책에 적혀 있어
임금자리 양보했다는 소문 부끄럽고 역신들 따라 밥먹기 수치스러워라.
공이 이에 초야에서 거닐거니 아버지는 자취 감추었네.
생질 추강은 사육신전을 지어 통탄했도다.
겨울에도 푸르른 송백 같은 정조, 용감하게 벼슬에서 물러나는 기백 우뚝함은
높은 산악 같고 깨끗함은 눈처럼 희어라.
오직 이 한 마음 인간이 갈 길을 이에 열고
선비의 기풍을 격앙함이 이제 500년 일세
초동의 산마루에 의연한 옛날 무덤,
나는 신도비명을 지어서 옥돌 속의 진주를 보았다고 하노라.》
 
《固城之孝勳烈世赫 麗季鮮初爲國柱 石懿哉草堂文質風格 讀聖賢書持敬無譯
庭訓在家孝友順適 洪範在國忠義己責 文宗念子英陵善積 猝値政變端宗失席
淸泠浦日鷺梁津夕·子規啼血杜鵑花赤 見幾而作宜在方冊 耻聞禪讓羞食從逆
公乃盤旋家君晦跡 甥姪秋江作傳痛惜 歲寒貞操勇退氣魄 巍和喬岳潔如雪白
惟此一心人道乃闢 激昻士風載今五百 草洞之崗依然故宅 我作銘辭叅珉見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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