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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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世 | 괴당공(槐堂公) 휘 만승(曼勝)(1590~1659)(은암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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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9-23 00:30 조회4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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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 [발전사의 기록에 오류가 있었기에 수정 게재합니다.]
 
公의 휘는 만승(曼勝)이요, 字는 숙망(叔望)이며 號는 괴당(槐堂)이다. 선조 23년 경진년 1590년에 탄생하였다. 3세 때에 모친상을 당하고 5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천애의 고아가 되었는데, 선친인 백암공(栢巖公)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에 창궐하였던 의병활동을 하였는바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호남지방에 가시었다가 도망한 노비들에게 화를 입게 되어 거창에서 순직하였다.
公은 9세에 이르러 큰칼 한 자루를 만들어 숫돌에 갈고 닦음이 10년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낸 연후에 드디어 현장에 납시어 범인을 추포(追捕)하여 진주 두적강(豆赤江)에서 처단함으로써 선친의 원수를 갚고는 늦은 삼년상을 치렀으니 마치 초상 때와 같았다고 한다.
일찍이 문진사(文進士) 익창(益昌)과 이지봉(李芝峰) 종영(宗榮)에게서 수업하고 만년에 동계 권도(棟溪 權濤)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선친의 삼년상을 마치고는 세상일에 사절(謝絶)하고 낙동강가에 관란정(觀瀾亭)을 짓고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후 고곡헌(古谷軒) 밖에 못을 파서 그곳에 작은 배를 만들어 띄우고 사옹(簑翁)이라 이름 하였거늘 모두 감동하여 함께 하였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에 公은 사직의 위태로움과 선친께서 창의(倡義)한 바 유지(有志)를 깊이 깨달은 고로 분연히 일어나 궐기를 한 바, 당시 감사(監司)가 조정에 이를 알림으로 9군․읍의 의병장으로 제수(除授)되어 전투현장인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에 이미 조정은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당한 이후라는 소식을 접하고는 격문(檄文)을 지어 보내 항복의 부당함은 부르짖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그 후 대곡의 옥천대 위에 호연정(浩然亭)을 건축하여 날마다 성리학(性理學)을 강의 하였다.
중신의 천거로 1647년에 태능참봉을 제수(除授)받고, 선조 27년인 1649년에는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그리고 1650년인 효종 1년에 동몽교관 선공감 주부(童蒙敎官繕工監 注簿)를 역임하고, 1653년에는 통훈대부 상의원 별제(通訓大夫 尙衣院 別提)의 벼슬을 받았다. 이후에 정승(政丞)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과 판서(判書) 오준(吳竣) 그리고 판서(判書) 갈은(渴隱) 유백증(兪伯曾)이 여덟 차례에 걸쳐 사간원(司諫院)에 천거(薦擧)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천리길을 통곡을 하며 달려가서 거듭하여 목을 매고 효종임금의 장례를 따랐다. 이후 병으로 지방에서 서울에 파견된 관리가 묵던 숙소에서(京邸) 숨을 거두었으니 그해 12월 15일이다. 운구가 돌아왔을 때에 조정의 모든 동료들이 모두 만사(挽詞)를 지어 제를 올려 바치거늘 충효지행(忠孝之行)은 세상을 바로 잡는 바탕이 되었다고 하였다. 문집으로 목판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괴당집(槐堂集)이 간행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묘소는 의령현 동쪽 정동리 문산에 있다. 성암정사(星巖精舍)는 公을 기리는 재실(齋室)인데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지은 성암정사기(星巖精舍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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