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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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世 | 문산공(文山公) 휘 진(瑨, 1216~1284)의 생애와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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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3-19 21:27 조회4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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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3년(1216) 정월에 5세 휘 인충(麟冲)의 외아들로 출생하시고 자(字) 국보(國贊)요 호는 문산(文山) 이시다.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어머님 유(柳)씨의 꿈에 신인(神人)이 푸른 빛 구슬을 주시며 매우 좋은 것이니 잡수시라 하여 부인께서 그 구슬을 받아먹고 꿈을 깬 후 곧 잉태하여 아들을 얻으시니 구슬 진(瑨) 字로 이름하였다” 고 한다.

    公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학문에 능하며 성품이 곧고 청렴하였으며 16세 되던 해인 고려 고종 신묘년(1231)에 문과에 급제하시었는데 그때에 시국이 어지러워 권모술수(權謀術數)와 간신이 판을 치고 있어 公께서 붓(筆)을 던지시고 왕의 부르심을 마다하고 돌아와 사양해 말씀하시기를 “배움이 넉넉해야 가히 벼슬을 할 수 있는 것이요 도(道)가 같아야 가히 임금을 섬길 수 있다” 하시며 스스로 호를 문산도인(文山道人)이라 하시고 고성군에 있는 문소산(고성읍 서쪽 20리 거리에 있는 산)에 들어가 은거하시었다.

  삼문남유기행(三文南遊紀行)이란 글에 따르면 公은 그 옛날 문소산에 들어가 거쳐하실 곳을 마련하고 편미(扁楣, 건물의 현판과 같은 뜻)를 망양(望洋)이라 하였다고 한다. 公은 이 망양정(望洋亭)에서 스스로를 굳게 지키면서 도(道)를 찾고 이치(理致)를 연구하면서 한 때의 적막감을 넘어 학문으로 혹은 훈업(勳業, 공적)으로 혹은 청백리(淸白吏)로서 절의(節義)가 높으셨다. 지금 망양정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으나 公이 남긴 향기는 오늘에도 예모습 그대로 우뚝 솟아 문소산과 함께 찬연(燦然)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당시의 집정(執政, 장차관급) 한 분이 公을 외교담당의 책임을 맡아주도록 추천하였으나 公은 “배우지 못한 내가 가히 견디지 못한다”하시고 굳이 사양하시었다. 그 후 고려 원종이 특별히 공을 불러 간의대부(諫議大夫, 정4품 국왕 보좌관급)를 시키려 하였으나 역시 병을 핑계로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경은 법도에 밝고 덕이 높은지라 여러 신하들을 통솔할 수 있고 온 백성들이 잘 따를 터인 즉 병을 핑계삼아 왕명을 거역치 말라” 하였으나 공께서는 “신이 先王(고종)을 섬길 때 한림원(翰林院)을 더렵혀마땅히 물불을 가리지 못하겠거늘 어찌 늙음을 빙자하여 임금을 섬기지 못한다 하리요마는 병 또한 잦은데다가 간의(諫議)라는 중대임무를 야인(野人)으로 봉직(奉職)할 바 더욱 아니오니 능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 라고 하셨다. 왕께서 다시 환관(宦官) 김신원을 보내시어 후한 예로서 부르셨으나 公은 끝내 듣지 않으시고 답하시기를 “조불합종고지향 어유지강호지락(鳥不合鐘鼓之響 魚惟知江湖之樂, 새는 종소리와 북소리의 리듬을 맞출줄 모르고, 고기는 오직 강호의 즐거움만 알듯이” 라고 하셨으니 “내 또한 이러하다” 하는 격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시니 김신원도 할 수 없이 돌아가 왕에게 公의 청렴한 뜻을 아뢰니 왕께서도 공의 부동(不動)의 지조를 아시고 절사(節士)라 하시었다 한다.
  그런데 당시에 公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어 왕명을 거역한다고 귀양 보내도록 아뢰었으나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李公은 청렴하고 덕이 있는 절사이거늘 어찌 가히 어지럽게 하리오. 그가 벼슬을 싫어함은 내가 덕이 없어 신하가 벼슬을 마다하니 부끄러워 하노라” 하시고는 왕명을 내려 公에게 해마다 식량과 옷감을 하사하시고 公이 계신 곳에 정문(旌門)을 세워주시고 그곳에서 옛날 성현들 문헌을 연구하게 하였으며 충열왕 10년(1284)에 향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시니 왕명으로 관청에서 장례를 뫼시도록 하였다.

  묘소는 고성군 회화면 봉동리에 6세 문산공(文山公)과 8세 문헌공(文憲公) 내외분이 상하로 모셔져 았다. 公의 아드님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역임하신 존비(尊庇) 이시다.
  그 후 임진왜란과 인조반정에 따른 혼란으로 선대 산소를 돌보지 못한 것이 백여년이 되었는지라 허물어진 묘소를 마침 문산공의 14세손 휘 하상(夏相)이 진주영장으로 도임하여 선세 3묘에 제물을 갖추어 배향한 후 묘역을 사초하고 퇴물된 묘비도 다시 세워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거늘 경상도관찰사 외후손 서문중(徐文重)은 묘비문을 쓰고, 외후손 고성현령 이필무(李必茂)가 세겨서 숙종 1684년 9월에 휘 하상(夏相)이 세운 묘전비가 있으나 오래되어 글자 또한 깎기고 허물어져 1983년에 후손 종은(鍾殷)공이 지은 비문【승문학사 철성이공 및 그 손자 부원군 묘비】에 다음과 같은 명시(銘詩)가 기록되어 있다.

      “은거하여 있어도 고상하고 깨끗함을 지키었도다. 왕의 신하가 되지 아니하고 돌아왔어라
      큰 공훈과 노고를 바치니 조정에서는 조토(胙土)의 은전(恩典)을 내렸네.
      그 자취 승국청죽지사(勝國靑竹之史, 고려의 역사책)에 실려 있고
      체백(體魄)은 고향 금봉산(金鳳山) 기슭에 안장(安葬) 되었고
      땅의 신령(神靈)함이 일어나서 역대 동량(棟樑)의 인재가 나왔고
      음덕(陰德)이 드리워지니 여섯 고을의 자손은 변창하였도다.
      이에 비석을 세우노니 때늦은 탄식은 있지마는
      선문(羨門, 남이 부러워하는 문중)으로 빛나니 백세의 옳음을 길이길이 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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