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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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世 | 문희공(文僖公) 휘 존비(尊庇, 1233~1287)의 생애와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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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3-19 21:26 조회5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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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은 고려 고총 20년(1233)에 휘 진(瑨)의 아들로 출생, 처음 이름은 인성(仁成), 휘는 존비(尊庇)요 字는 지정(持正), 덕안(德安), 후백(厚伯)이며 시호가 문희(文僖)이시다. 일찍이 부모를 떠나 외삼촌인 백문절(白文節)공에게 글을 배워 글도 잘 지으시고 글씨도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쓰셨으며 운치있는 문장과 덕망을 세상에 높이 떨치셨다. 고려 원종1년(1260) 문과에 급제하시고 벼슬은 정의대부 좌상시(正議太夫 左常侍, 정3품, 국왕보좌역), 문한학사(文翰學士, 왕의 명령이나 알리는 글을 작성하는 관청의 학사),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 정2품)을 거쳐 세자원빈(世子元嬪, 정3품, 왕자를 기르키는 스승)이 되셨으며, 감찰대부(監察大夫, 정3품 관원에 대한 사정책임자)를 역임하시고 충열왕 5년(1279)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종1품 국왕비서실장 격)에 오르셨다.
  고려 충렬왕 7년(1281) 일본을 정벌할 때 충청, 전라, 경상의 3도 도순문사(都巡問使, 별정직의 군사령관)가 되시어 군량과 군함을 동원하여 전쟁을 이기게 하는데 공을 세우셨다. 또한 30년간이나 전선(銓選, 인재를 전형하여 선발함)의 책임을 맡아 성균관 진사로서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는데 큰 업적을 쌓았다는 칭송을 받으셨다.

  한편 충열왕이 중국 원나라에 가시면서 국사를 公에게  맡기시니 3년 동안이나 섭정(攝政, 왕의 고유의 국무를 대행하는 일)을 하면서도 일가친척이나 자손들을 한 사람도 벼슬자리에 채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관원들과 백성들이 기쁘고 흡족하게 생각하고 조정이 튼튼하여 비방하는 자가 없었으니 公을 우러러 뫼시었다 한다. 충렬왕 13년(1287) 1월7일에 公께서 세상을 떠나시니 세자(후에 충선왕)가 울며 “李모는 정직하고 어지신 분이 신데 어찌 이같이 돌아가셨는고” 하시며 슬퍼하시는 것을 왕께서 보시고 놀라시며 함께 탄식하시고 명을 내려 公을 왕의 예로서 형강(지금의 금강 상류) 위 마을 뒷산에 장례케 하시고 그 산의 사방 4리를 봉하여 왕묘동(王墓洞)이라 부르게 하시고 시호를 문희(文僖)로 내리셨다. 그때부터 이곳 마을 이름을 산사리라 부르게 되었다.

  公익 묘소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 소전리(왕묘동)에 배위 익산군부인 익산이씨(益山郡夫人 益山李氏)와 합장으로 모셨으며 매년 음력 10월 초6일에 세향을 받들고 있다. 장남으로 우(瑀, 문헌공), 차남은 정(精, 覺眞國師), 3남은 양온승동정(良醞丞同正) 숙(璹)이시다. 그러나 공의 묘비명과 신도비명에는 3자 숙의 기록은 없다.
  문희공에 관련된 금석문(金石文)은 고려사(高麗史) 외에 1287년에 제작한 이상국묘지명, 1965년에 새운 김필호선생의 신도비문, 권용현선생의 묘비문 등에 세겨져 있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상국 묘지석(墓誌石)은 1297년 윤2월23일에 완성한 것으로, 크기가 가로 51cm, 세로 81cm이고 글자 크기는 그 지름이 2cm이며, 글자수는 대자(大字) 5자, 제목 28자, 비문 680자 등 모두 713자로 된 석물로서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지석문 중의 명시(銘詩)는 다음과 같다.

      “심성이 부드럽고 단아하시며 문장과 필력(筆力)이 뛰어나시니.
      사입약계(四入藥階, 네가지의 큰 벼슬)하시고 고관을 지내셨다.
      한번 어사대에 오르시니 서민도 두려워하는구나
      두 번이나 지공거로 과거를 관장하시니 영재가 많이 모여들었도다.
      네 아들이 꿰어진 구슬 같으니 마치 호랑이와 용이 다투어 뛰는 듯하다.
      높은 벼슬에 오르셨으나 어찌 최고위인 황각(黃閣)에는 오르지 못했는가
      이미 오순을 넘었는데 하미지황발(何未知黃髮)인가
      천도(天道) 망망하니 이 일을 탓할 자 누구일까
      (묘소앞)물이 맑고 빼어난 높은 산아래 묻히시니
      자손이 영화롭고 번창하리라.“

  원래 문희공의 신도비를 갑술보(1874년) 발간 여유자금으로 건립하려 하였으나 그 일을 맡아서 진행하든 종친이 변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신도비와 묘비를 1956년 철성문고를 발간한 잉여금으로 준비하여 1965년에 두 비를 같은 해에 건립하게 되었으며, 도주 김필호(金弼鎬)가 짓고 은진 송우용(宋友用)이 글을 쓰고 창녕 성경운(成景運)이 전자를 쓴 신도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명시(銘詩)가 새겨져 있다.

      “이씨(李氏)는 철성(鐵城)을 복(福; 식읍)으로 받아 명성과 덕망을 가풍으로 전해 받아
      그 영향이 이어 흘러서 대대로 그 영화를 떨쳤도다.
      공이 태어남에 미쳐서는 빛이 전보다 더하여
      영화를 맛보았고 경술(經術, 경전에 관한 학문)을 가졌었다.
      가시를 철거하고 바퀴의 괴임을 빼어(벼슴길에 나아감) 독수리처럼 가로질러 날랐다.(官職의 陞差).
      크게 화려한 자리(높은 官職을 말함)를 두루 역임하여 한 시대를 빼어났었다.
      측근에 있으면서 임금의 잘못을 능히 바로 잡았다(克補).
      오직 직책 그것 만을 따랐으니 급하여 내몸 먼지나 떨었겠나
      임금의 위엄과 부딪혀도 세차게 맞서니(임금에 直言으로 간청) 조정에서 드러난 사람도 놀라서
      떨었지만 끝내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니 너의 충성이 아름답다 말했다.
      덕을 갖추어 펼쳤으니 적응 아니함이 없었다.
      북으로 찾아가고 남으로 베풀어 그것을 완수하고 공을 거두어 들였다.
      큰 수레가(임금의 수레가) 북에 머물 때(元나라에 있을 때) 정무(政務)의 전권(全權)을 총괄하고
      조회를 받는 곳이 비어있음을(임금이 元나라에 가 있음을 말함) 걱정하다가 임금의 수례를
      맞아들이면서(上을 받들고 귀국하면서)
      충성스런 마음으로 꾀를 쓰다가 도리어 견책을 받고 쫓겨 났다.
      거치른 물가에 올빼미처럼 부처(付處)되니(외로이 귀양가 있으니)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상(上)이 끝내는 깨닫고 특별히 봉(封)함을 내렸으나(궈양을 풀고 官職을 내렸으나)
      명(命)을 연장시키는데는 미치지 못했다. 상(上)은 슬픔을 더욱 더하여
      특수한 은전(恩典)을 더하고 왕례(王禮)로 장례(葬禮)했다.
      저 무덤을 보고는 천년도록 지점(指點, 눈에 익혀두었다가 손가락으로 가리킴) 할 것이다.
      아름다운 자취는 빛나서 이와 더불어 함께 전해지리라.“

1965년 새워진 묘비에는 화산 권용현(權龍鉉) 선생이 지은 비문중의 명시(銘詩)는 다음과 같다.

      “학문하여 여유가 있으면 벼슬하니 벼슬은 학문이 근본이다.
      벼슬과 학문은 서로 의뢰하는 것이 오직 옛 부터의 법칙이다.
      이교(異敎, 異端 다른 종교)가 뒤덮을 때 홀로 바른 맥(脈)을 찾았다.
      밖으로 오랑캐가 침범함에 스스로 강하게 할 계책이 있었다.
      학문에 근본하지 않았었다면 그 정의가 있었겠는가.
      뜻대로 펼쳤구나 문희공이여 학문으로서 벼슬을 했도다.
      뉘라서 그 공을 논하리요 근본을 미루어 보지 않겠나
      내 글을 새겨서 밝히노니 백세로 스승을 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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