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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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世 | 행촌공(杏村公) 휘 암(嵒)(1297~1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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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3-19 21:24 조회6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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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은 초명(初名)이 군해(君侅)이시고 개명(改名)은 암(嵒)이시며 字는 익지(翼之) 또는 고운(古雲)이시고 호는 행촌(杏村)이요, 시호는 문정(文貞)이시다. 충렬왕 23년(1297. 4. 15) 고성 서문밖 송곡촌에서 문헌공(文憲公, 휘 瑀)의 장남으로 출생하시었다.
  公은 고려의 문신(文臣)이고 서화가(書畵家)이시다. 충선왕 5년(1313)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시어 조정 (朝廷)에 총애를 받았으며 충숙왕 원년(1314) 왕실의 전의령(典儀令)과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 대변인 격) 으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겸직하시다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 충숙왕 17년(1330)에 육조(六曹) 의 정5품인 도관정랑(都官正郞)과 왕명을 전하는 승지(承旨) 벼슬인 우부대언(右副代言)을 맡으시다가 충혜왕 원년(1331)에 동지공거(同知貢擧, 고시위원 격)를 맡아오던 중 충숙왕(1332년)이 복위하자 전왕(前王)에게 총애를 받은 신하라 하여 “장유해도(杖流海島, 곤장을 치고 섬으로 귀양보냄)하니 그 아버님 文憲公께서 도 아들의 죄를 들어 삭탈관직하여 전리(田里)로 귀양가게 되는 비운을 겪으시었다. 9년후 충혜왕 2년 (1341)에 왕의 부르심을 받고 입궐 하시어 왕명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심과 동시에 지공거(知貢擧, 고시위원장)가 되시어 공사(貢士) 안원용 등 33명을 선발하였으며 근수승묵 무일호가대(謹守繩墨 無一豪仮貸)라, 정사에는 청렴과 공정으로 일관하여 추호의 거짓과 구김이 없었으며 “가사의 빈부를 불문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시었으며 조정의 신하와 선비들이 훌륭한 분을 모시고 정사를 논하게 되었다 하며 기뻐들 하였다고 한다.

  충목왕 3년(1347)에 우대언(右代言, 비서실장 격)에 선임되셨고 충정왕 원년(1349)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왕위계승을 승인받으러 가시는 동안 왕명으로 제조정방(提調政房, 왕이 아닌 사람이 왕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직위)을 맡았으며 문화부의 정2품인 찬성사(贊成事)가 되셨다.
  그해 10윌에는 좌정승을 역임하셨고 그 후 공민왕 즉위년(1352)에 관직을 사퇴하고 춘천 부근 청평산에 입산하여 학문을 하시며 은거하셨는데 공민왕 7년(1358)에 왕이 다시 부르심에 환도(還都)하여 6년만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국무총리 격)에 제수되시어 서북면 병마도원수(西北面兵馬都元帥, 참모총장 격)가 되어 홍건적을 격퇴하였으며 왕 10년(1361)에 다시 홍건적 10만명이 습격해왔을 때 아군이 분전(奮戰)하였으나 세력부족으로 公의 셋째인 상호군(上護軍) 휘 음(陰)과 조천주 등이 전몰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 세운 총병관(總兵官) 정세운을 도와 군사의 사기를 돋구어 승전(勝戰)으로 이끌었으며 조카이신 휘 희필(希泌)과 한방신이 함께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서경(평양)을 지키던 병사들이 모의하여 말하기를 “군량이 샇여있는 창고를 적에게 빼았기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면서 불을 지르고 후퇴하자고 건의하거늘 公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없다고 하시고 다른 계략으로서 우리의 병사수가 적고 약해보이면 적은 자만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 반격을 가하게 되면 승전으로 이끌게 될 것인 즉 군량미 창고를 불살라 우리 어쩌 다음에 쓰지 못할 것인고” 하셨는데 한달이 채 못되어서 반격하여 公의 전략대로 적을 섬멸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왕과 공주가 태후(太后)를 받들고 남쪽 복주(현 안동)로 피란하실 때 수행한 사람은 문하시중이신 公과 도촌공의 장자인 임(琳) 장군과 이색, 홍언박 이었다고 고려사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公께 서는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나시니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정1품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을 봉(封)하시었으며 일등공신으로 추성수의 동덕찬화 익조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보국(推誠守義 同德贊化 翊祚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輔國)의 훈(勳)을 내리셨다.

  부모와 배위는 모두 봉작(封爵, 작위를 받음) 되셨고, “관청에서 작위를 받으신 분의 아들중 한 사람은 7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내리고, 아들이 없으면 생질이나 사위 1인에게 8품을 내리는 국법」에 따라 셋째 아드님 음(蔭)을 상장군(上將軍)에 제수(除授, 천거의 절차를 밟지않고 임금이 벼슬을 바로 내림)하였으며 농경지 약 10만평(田 百結)과 노비 10여명을 하사하시었다.
  공민왕 13년(1364) 5월5일에 향년 68세로 돌아가시니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내리시고 왕께서 슬퍼하시며 “원로(元老)여 몸은 비록 갔었으나 그 공(功)은 살아있으니 그대 의용(儀容)을 그려 모든 재상들에게 기풍(氣風)을 진작(振作, 떨쳐 일어나게 함)케 하리라” 하고 친히 화공에게 명하여 公의 초상화를 그려 杏村이란 두글자를 써서 왕궁에 걸게하고 붕주(朋酒)를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한다. 청파공(靑坡公, 휘 陸)의 견문기인 청파극담(靑坡劇談)이란 서책에 그 영상(影像)이 나의 집에 소중하게 소장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도학문명(道學文名)을 크게 떨치시었고 또한 公의 필법(筆法)은 동양 필법정신(筆法精神)의 효시(嚆矢)로서 중국의 조자앙(趙子昻)을 능가하는 필적(筆跡)이라고 필원잡기(筆苑雜記)에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의 김생 (金生)과 고려의 이암(李嵒) 두 명필이 있었다고 대전사기(大傳史記)는 전하고 있다. 또한 행촌공은 태갑편(太甲編)을 쓰시어 왕에게 바쳤다고 고려사 열전(列傳)은 기록하고 있으며 원나라 황제가 公의 명필을 전해 듣고 특별히 초청하여 연화경(蓮花經, 불교 경전의 일종)을 쓰시게 하시니 신해년 10월9일 묘시(卯時)에 시작하여 신시(申時)까지 하룻만에 열 첩(帖, 권)이나 되는 수만 자(字)를 필사하여 왕에게 바치니 크게 놀라 기뻐하시며 그중에서 한 첩은 다시 돌려 주시면서 “자손 만대에 가보로 삼으라” 하시었다고 지봉류설(芝峰類說)은 전하고 있으며, 또한 公께서 그린 그림으로는 풍죽(風竹,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 그림)과 노죽(露竹, 안개속에 묻혀있는 대나무 그림)을 그리시었으니 왕께서 풍죽(風竹)을 칭찬하시면서 “행촌심사숙심허 소쇄단장양유여 사향청창원상대 청풍만고화란여(杏村心似竹心虛 蕭灑端莊兩有餘 寫向晴窓菀相對 淸風萬古畵難如, 행촌의 속마음은 대나무가 속은 비었으나 굿굿함과 같고, 티끌을 씻고 단정하게 차린 바가 둘다 넉넉하다. 그래서 밝은 창에 비치니 완연히 직접 대하는 것 같으니, 청풍을 만고에 어려운 그림으로 그렸도다)라고 하셨으며 노죽(露竹)에 대한 칭찬으로는 ”노무조조송박한 천교정세벽랑간 분명상여행촌사 직절수용속안간(露霧朝朝送薄寒 天敎淨洗壁琅玕 分明相與杏村似 直節誰容俗眼看, 안개와 이슬 젖은 아침마다 찬 바람이 부는 것 같고, 천품과 같이 깨끗하여 구슬 굴리는 것 같아, 이는 분명 행촌과 같이 대응하는 것 같으니 그 곧은 절개는 속인의 눈으로 누가 볼 수 있을까)라고 하였으며 이는 목은집에서 전하고 있다.
  또 서거정선생이 지으신 용헌신도비명(容軒神道碑銘)에 “좌정승 휘 암은 재겸장상(才兼將相, 재능을 겸비한 장군이요 재상임)으로 이름이 세상에 떨치니 그 詩는 역시 간결고고(簡潔孤高)하고 진행초삼법(眞行草三法)이 절묘하다” 하였다. 杏村公의 저서로 경세실무(經世實務)의 학문인 농상집요(農桑輯要)와 도학심법(道學心法)을 소개한 태백진훈(太白眞訓), 그리고 고대 원시국가의 체통을 밝힌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들 수 있다. 우리 역사가 있은 후로 杏村公의 농상집요(農桑輯要)는 실로 농업의 원조가 되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의 효시(嚆矢)가 된다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전 농업입국의 큰 정책하에서 새로이 농학의 종합계획을 시작한 것이며 왕도를 융성하게 일으키고 백성의 생업을 계몽시킨 동양정치의 근본원리를 연역(演繹)하여 후세에 정치적 귀감으로 만들었다고 근대에 우리문중의 석학이신 고 이유립(李裕岦, 호 한암당) 선생이 설명하시었으며 또한 조선역사의 첫 장(章)이 농업경제의 기록이요 동양고대의 정치철학이 농업 제일주의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농업이 존중되어 온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농업이 학문의 대상이 된 것은 먼 후세에 와서 이루어진 듯하다. 杏村公은 백성이 생업에 어둡고 의식주를 하늘에 맡기는(一仰於天)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를 근심하여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이를 이름하여 농상집요라 하였으니 목은 이색의 서문을 실어 책으로 간행되었다.

  단군고기(檀君古記)중에서 단군세기(檀君世紀)는 오래된 책으로 그 서문에 “나라와 역사는 나란히 이루어지는 것이며 백성과 정치도 따로 나누어질 수 없다. 정치라는 것은 오로지 백성의 뜻에 따르는 것이고, 백성은 오로지 바른 길을 생각하여야 되는 것이니 백성의 뜻에 어찌 역행하는 정치가 있겠는가. 나라에는 모습이 있고 역사에는 얼이 있거늘 얼을 잃고 국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바르게 다스리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요 모습과 얼을 함께 갖추는 것도 내 스스로 할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은 먼저 내 자신을 알고 어떠한 것부터 알아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도 내 자신인 것이다. 고대 부여는 스스로 갈길을 잃었으니 한족이 침범하여 점령해 버렸고 고려 역시 갈길을 잃었으니 몽고족이 처들어와 점령해 버렸다. 그때 부여나 고려가 참다운 길을 갔더라면 한족은 한나라로 되돌아갔을 것이고 몽고 사람들은 몽고로 돌아갔을 것이다. 공민왕 12년(1363) 10월3일 강화 해운당에서 홍행촌(紅杏村) 늙은이가 쓰다” 라고 하시었다. 지금 해운당(海雲堂) 건물은 없으나 건물 자취를 찾기 위해서 1992년 4월에 후손 고 기태(基泰)씨가 강화문화원의 협조로 강도지(江都誌, 1932년 박현용이 지은 경기도 강화도의 연혁, 인문, 지리 등을 총 망라한 책)에 의거하여 현지를 탐사 확인했다. 그 해운당은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남산, 현 강화읍 남산 병풍바위 앞에 있었으며 이곳이 杏村公께서 단군세기를 써신 곳이다.

  이 단군고기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삼성기(三聖記)와 단군세기, 북부여기(北夫餘記), 태백일사(太白通史)로 묶어서 엮은 역사책으로서 그중 단군세기는 杏村公께서, 太白逢史는 사암공의 넷째 아드님이신 일십당 (一十堂) 이맥(李陌)공께서 쓰시었으니 그 태백일사에서 이르되 “杏村선생께서 일찌기 권선의 무리들이 고려의 국호를 폐하려 하자 이를 만류하여 청하되 하늘아래 사람들은 각각 자기나라를 나라로 삼고 자기풍속을 가지고 풍속으로 삼는다. 국계(國界)를 허물지 말라. 우리나라는 환웅과 단군 이래로 천제(天帝)의 아들로 칭하고 살아온 단일 민족이요 오랑캐 무리와는 근본이 다르다. 지금 일시로 다른 사람의 발밑에 있기는 하나 혼과 정신과 피와 살이 같은 근원의 조상을 갖고 있으니 신시개천(神市開天)으로 삼한관경(三韓管境) 을 평정하여 크고 이름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왕건 태조가 고려를 창업한 후 다물국(多勿國)의 풍습과 정신을 계승하여 나라의 명성을 크게 떨쳐야 한다고 하였으며 지금 우리는 강한 이웃이 생겨 틈틈이 횡포를 당하고 있어 산동반도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함이 한스러워 군신(君臣)은 불철주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을 키우고 있는데 잠청(潛淸, 고려의 간신배인 吳潛과 柳淸臣을 가리킴)의 무리들이 국호를 폐하려 함은 가당치 않다고 역설 하시었다 한다.
  또한 公께서 돌아가시자 당시의 충신이며 주자학의 거성인 이인복 선생은 만장(輓章, 죽은 사람을 슬퍼하여 지은 글)에서 “황각풍성원 난정진적유〈(黃閣風聲遠 蘭亭眞蹟遺, 정승이 드나드는 대문에 바람 소리가 멀어지고 난정(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은 중국의 정자) 에는 참으로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다〉” 하시었고 거 유(巨儒)인 직산 백문보선생은 “왕수첨풍채 은구영일광(王樹添風采 銀狗映日光, 아름다운 나무에 채색바람 더하였고 은고리는 해가 비치니 더욱 아름답다)” 하였으니 公의 업적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며 그후 고려 우왕 원년(1375)에 公을 충정왕 묘정(종묘)에 함께 배향하였으며 조선 경종 원년(1721)에는 사림(士林)들이 위패를 갈천서원(葛川書院, 고성군 소재)에 봉안하였고 고종 36년(1899)에는 18대손 진(珒)께서 고성 송곡촌에 유허비(遺墟碑, 文貞公 杏村 李先生 遺墟碑文 참조)를 건립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에 있으나 현 군사분계선 이북이므로 고성 금봉재 옆에 설단하여 음력 10월 초3일에 단향(壇享)을 올리고 있다.
배위는 삼한국부인 남양홍씨(三韓國夫人 南陽洪氏)이고 公이 모셔져 있는 갈천서원의 향사일은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이며, 장자는 인(寅, 密直門下評理), 2자는 숭(崇, 安靖公, 安靖公派 派祖), 3자는 음(蔭, 上將軍), 4자는 강(岡, 平齋公, 시호 文敬公), 5자는 목(牧, 郞將) 이시다.

    행촌공에 관한 기록들은 국역고려사 25권 열전6권 11~15면에 있으며, 목은 이색이 쓴 행촌공의 묘지명, 단군세기 서문, 청파문집에 실려있는 문정공 기실 등에 나타나 있으며, 목은 이색이 쓴 묘지명 병서에 수록된 명시는 다음과 같다.

      “훌륭한 문정공이여! 철성군을 봉하였도다
      좌정승에 올라서 항상 성만(盛滿)함을 경계하였도다.
      자신이 물러나니 물도 푸르고 산도 밝도다.
      구름같이 진퇴하니 아득하여 무정하도다
      묘당에 돌아가 성색을 동하지 않았도다
      군진을 몰아 서경 싸움에 적을 무찔렀도다
      하늘이 낸 공의 충성은 종용(從容)히 계책을 이뤘도다
      적병을 유인하여 쳐부셔 구묘(九廟)가 놀라지 않았도다.
      사람이 탄복한 것은 시서(詩書)와 용병(用兵) 이었도다.
      큰 공적 세상을 덮었으니 적은 것을 어찌 평(評)하겠는가
      왕이 원로라 하였으나 죽었어도 오히려 살았도다
      초상을 그려 걸었으니 의형을 그려 열경(列卿)을 풍동(風動) 하였도다.
      그림이 이루어짐에 제사를 지내셨도다.
      여러 산하를 권장한 소치로 자손이 영화를 누렸도다.
      이제 옛일이 되였으나 군신의 정기가 모임이로다
      죽었으도 죽지 않음이니 이는 오직 성심이었도다.
      사기를 쓰는 자는 이 명(銘) 을 징거할지어다.

    巍巍文貞開府鐵城 初宅左揆曰噫戒盈 奉身而退水綠山明 如雲卷舒杳乎無情 
    還居廟堂不動色聲 長蛇封豕就戮西京 天啓公衷從容策成 俾驕以覆九廟不驚 
    人始歎服詩書用兵 大己蓋世其細奚評 王曰元老雖死猶生 我f義圖之以風列卿
    旣肖明禋繼伻列卿 用勸子孫興榮自古 在昔君臣聚精不亡 其匪他曰誠詔爾太
    史尙徵斯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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