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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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世 | 안정공(安靖公) 휘 숭(崇) (1326-1394)(안정공파 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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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3-19 21:22 조회4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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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의 휘는 숭(崇)이요 字는 숭지(崇之), 시호는 안정(安靖)이시다. 1326년(충숙왕 13년) 杏村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시어 어려서부터 특히 무예에 뛰어 나시니 공민왕 6년 33세의 나이로 북방의 오랑캐들이 자주 침범하는 니성(泥城) 만호(萬戶, 종4품으로 지역 경비를 담당하든 무관)가 되셨다가 귀주(평안북도에 있는 고을) 병마사(兵馬使)가 되셨으니 공민왕때 모적과 홍건적을 무찌른 공으로 삭주의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셨는데 당시 이성계와 함께 그칠 사이 없이 침범하는 오랑캐를 무찌르고 공민왕 14년(1366)에는 서북면(지금의 평안북도) 체복사(體覆使) 겸 안북대도호부사(安北大都護府使, 지금의 군사령관)로 승진되었으며 특별히 분충정원공신(奮忠定遠功臣, 靖社한 신하에게 내리는 훈호) 동지예문관사(同知藝文館事)를 내리시고 고성군(固城君)에 훈봉되셨다.

  그리하여 원형벽상(圓形壁上, 어전 출입하는 곳에 걸어놓는 사진)케 되시고 고려때의 호국총신(護國忠臣) 이라 하여 왕의 총애를 받으셨다, 이러한 公께서는 위의 벼슬 이외에 어사대부(御使大夫)와 태학감(太學監, 지금의 성균관으로 그곳의 학장격 임), 그리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지내셨는데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가 등극한 후인 조선건국 3년(1394) 12월 15일 6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니 이태조께서는 과거의 정의와 충정을, 특히 公의 무예를 높이 평가하여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종1품)의 벼슬을 추가로 증직하시고 장례를 관비장(官費葬)으로 모시게 하였으며 안정(安靖)의 시호도 내려졌다.
  그러나 公의 묘는 전해지지 않아서 후손들은 몹시 안타까운 심정으로 추원감(追遠感)을 애태우면서 우리의 미진한 한으로 남겨놓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안정공의 큰 아들 휘 민(岷, 가선대부 한성판윤)께서는 공민왕 때 성균관(국자감)의 대사성(大司成)을 지내셨는데 그때는 나라 안에서 민심이 흉흉하고 어지러웠으며 더욱이 포은 정몽주의 개성 선죽교 피화사건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망국의 흉사가 자주 일어나 충신과 열사가 설 땅을 잃고 하늘을 우러러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 잡으려 하였으나 고려 왕조가 시한이 다 되었음인지 이태조가 이씨조선을 건국한 후 公께 한성판윤(漢城判尹, 지금의 서울시장)의 교지를 내렸으나 公께서는 끝내 벼슬을 마다하고 망국의 한을 품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다가 정착하신 곳이 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백석향이라는 곳으로, 현재 安靖公 후손들이 판윤공(判尹公)의 묘소를 수호(1998년 4월 6일 사초 및 묘비를 세움, 30세 전 홍성군수 基亨)하면서, 이곳을 근간으로 서울, 부산, 대전, 상주 등 전국에 수백호가 거주고 있으며 지금부터 50여년전에 安靖公 단소를 이곳 판윤공 묘소 바로 옆에 마련하여 매년 음력 10월 7일 시제를 모셔오면서 1969년 2월에 행적비(行蹟碑)를 세웠다.

  그 후로 전국의 安靖公 후손들이 합심하여 우리의 미진한 한을 품고 잃어버린 묘소를 찾기 위하여 역사적 고증과 전해오는 전설 등 백방으로 수소문 끝에 경기도 광릉, 조선 7대 세조 묘역부근에 고성이씨 달마장군(당시 安靖公께서는 활 잘 쏘고 무예가 뛰어나 일명 달마장군이라 했으며, 일본인 역사가 본거천장(本居傳長)의 저서에 기록)의 묘가 있다하여 그 곳을 달마동이라 했고, 이곳 주민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1979년 문화재 관리국에 분묘 확인발굴 신청을 하여 허가를 받아 1986년 4월 2일 당시 대좀회장 웅열(雄烈), 고문 찬(璨)을 비롯하여 경향각지의 安靖公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사초까지 하였으나 끝내는 역사적 고증과 확실한 기록을 찾지 못하고 이 사업 또한 무위로 끝나고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2001년 7월 19일 대종회 고문 찬, 安靖公派 전 회장 명연(明淵), 당시 회장 규연(珪淵), 대전명친회 회장 기형(基亨) 등 많은 종원이 참여한 가운데 단소(壇所) 주변을 확장, 사초, 행적비 정비 및 석물교체 등 단소 정화사업을 성대하게 마치고, 오래된 모선재도 정성을 다하여 중건함으로서 다시 한번 숭조목족의 정신을 기렸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청주이씨와, 정겸부인 파평윤씨이며, 장자는 판윤공(한성판윤, 岷), 2자는 소감공(可宰少監公, 嶙), 3자는 가선부사공(嘉善府使公, 峙), 4자는 상장군공(上將軍公 延壽) 이시다.
  1969년 2월에 세운 제단비에는 은진 송재성이 글을 짓고 후손 기수가 글을 쓴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명시(銘詩)가 있다.

      문무의 재주가 겸비하고 완전하여 소문이 널리 났도다.
      난리를 평정하고 국정을 도왔으니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케 하였도다.
      태조 개국하여 은명(恩命)이 이르도다.
      대다수 묘소를 잃었도다.
      후손이 단을 모아 제사를 올리도다.
      행적을 적은 돌을 세우니 천추에 전하리라.

      文武兼全才藝播聞  勘亂輔政護國安民  聖祖龍興恩命荐臻
      世代久遠藏魄失傳  後裔設壇敬薦芯芬  堅石紀蹟千秋不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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