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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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世 | 평재공(平齋公) 휘 강(岡, 1333-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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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3-19 21:21 조회3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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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村公의 넷째 아드님이시며 처음 휘는 강(綱), 字는 사비(思卑), 호는 평재(平齋), 시호는 문경(文敬) 이시다. 충숙왕 2년(1333)에 출생하시어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시고 공신가문의 후예로 추대되어 복두점록사(幞頭店錄事, 홍건적 침공에 대비한 임시관서의 문관)로 등용된 후 정7품 직장(直長), 정6품 원외랑(員外郞)을 거쳐 문하성(門下省)의 사간(司諫, 사정담당)을 지내시고 정4품인 시랑(侍郞), 국왕비서격인 대언(代言), 정3품으로 도승지(都承旨)와 같은 품격인 지신사(知申事)와 대학 총장격인 정2품인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시어 종2품인 봉익대부(奉翊大夫)가 되시었다.
  또한 公은 충혜왕이 세자로 있을 때 훌륭한 서연시독(書筵侍讀, 세자의 글을 가르치는 선비)로 뽑혀 세자를 가르치게 되었으며 충혜왕이 즉위 l년만에 왕위에서 물러나(당시 충숙왕과 왕위 계승문제가 혼잡했음)  강화로 가실 때 충의(忠義)를 못잊어 公이 홀로 따라가셨다.

  후에 공민왕이 즉위하시어 公을 기특하게 여기시어 주부(主簿)의 자리에 앉히시고 항상 왕의 좌우에 있게 하시니 公께서는 몸가짐을 더욱 근신하셨다. 그 후 호부(戶部), 병부(兵部)를 거쳐 이부(吏部)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公께서 아뢰기를 “신이 붓을 들어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을 불감(不敢)하게 생각합니다” 하시니 왕께서 더욱 중하게 여기시었다 한다.
  그후 공민왕 10년(1361)에 경상도 안렴사(安廉使, 고려때 지방장관)로 나가셨는데 당시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범해오자 국왕과 백성들이 남쪽으로 피란하게 되어 公께서 남쪽과 북방을 순회하시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몽진(蒙塵, 국왕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감)한 왕을 섬기는 의례(儀禮)에 정성을 다했고 모두가 합심하여 국왕을 만족스럽게 하였으며, 백성들의 단합과 충만한 사기로 반격준비를 갖추는데 뒷받침을 잘하여 마침내 홍건적을 격퇴하였으므로 公에 대한 칭송이 높았다.
  그 후 환도하여 문정공이 원송수를 대신하여 전선(銓選, 인재를 전형하여 선발함)을 맡으시어 전국 방방곡곡에 빠짐없이 연결하여 응시의 기회를 잃지 않게 하여 백성들이 흡족해 했을 뿐 아니라 훌륭한 인재를 뽑는데 커다란 공을 세우셨다.
  공민왕 17년(1368)에 公이 돌아가시었으니 향년 36세이시었다. 공민왕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어이하여 나의 어진 신하를 빨리 빼았는가” 하시며 후한 조의금품을 내리시고 태상시(太常侍, 시호와 제사를  맡는 관서)에 公의 시호를 특별히 논하게 하였으나 추밀원(樞密院, 왕명을 출납하는 관서)에서 불응하였으니 왕께서 특별히 시호를 내리겠다 하시고 李모(平齋公을 지칭함)는 오랫동안 충성을 다한 문신(文臣)이니  문경(文敬)으로 함이 마땅하다 하시며 공민왕이 친히 시호를 내렸으며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봉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에 추가로 증직하셨다.
 
  公의 묘는 풍덕 남촌(藍村) 제능화소(이북)에 있다고 하나 찾을 길이 없으며 목은 이색이 비문을 썼으며 배위묘소는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 근처에 있었으나 실묘했다. 1991년 가을에 경기도 광주시 목리 아드님  용헌공 묘소 오른쪽에 단소를 마련하고 단비(壇碑)를 세우니 순천후인 김철희가 글을 짖고 월성 최병찬이 글을 쓰고, 예천 권창윤이 앞면의 글을 썼다, 그리고 배위는 진한국부인 청주곽씨이시고 아드님은 容軒公 휘 원(原) 이시다.

  목은 이색공이 지어신 묘비문 中의 명시(銘詩,①)와, 1991년 김철희공이 지어신 단비문 중의 명시(銘詩, ②)는 다음과 같다.
      ① 어찌 그 온전한 덕을 주시고 수명은 주시지 않으셨는가?
      희미하도다. 그 하늘의 정하지 못하심이여,
      내 이 명(銘)을 새기어 천년토록 알리노니
      오히려 우리 문경공을 상고할 수 있으리라.
      ② 학문이 있으되 깊으며 덕이 있으되 이뤄졌고
      선(善)을 좋아하되 독실하고 마음을 가지되 평온하더라.
      이와 같은 생계로 어찌 불만 이리오.
      일찍 경사(京師)에 나가니 진로가 바야흐로 형통하도다.
      널리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을 지나 곧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이요
      일시 변경(邊境) 경수(警守)로 안렴사(按廉使)로 경상도 (慶尙道)에 갔었고
      개정을 아뢰는 말에 꾀꼬리가 울었도다.
      가히 상림(商霖, 가뭄에 내리는 단비)이 되었으며 가히 주정(周楨, 기둥)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하늘이 은혜(恩惠)롭지 못한 영화(榮華)인고
      만리나 가야하는 기름친 수레가 중도에서 꺽였네
      왕이 슬퍼하여 시호를 특사(特賜)하셨고
      목은옹(牧隱翁)이 묘지명(墓誌銘)을 쓰고 뜨거운 눈물로 갓끈을 적셨네.
      선(善)에 어찌 보답이 없으리요. 아들이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이라
      공은 분개하고 한하지 마소서 슬픔과 영화가 어울렸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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