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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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世 | 시줌공(待中公) 휘 림(琳) (1323-1391) (도촌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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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3-19 21:20 조회5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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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철성부원군(壁上三韓三重大匡 門下侍中 鐵城府院君) 휘 림(琳)은 도촌공 휘 교(嶠)의 2남중 맏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
  公의 일생은 왕조가 교체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구(國舅, 왕의 장인)의 몸으로 왕실을 받들고 국정을 보살피던 영광된 시기와, 새로이 등장한 세력에 의해 반역의 허물을 쓰고 배소(配所)를 전전하며 울분과 비통의 시간속에서 삶을 마감하신 비운의 시기로 확연히 대별된다. 이러한 公의 행적(行績)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으로는 고려의 역사를 군주적 시각에서 정리한 고려사와 신하적 시각에서 기술한 고려사절요(節要), 그리고 조선왕조실록(태조, 태종 실록) 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위의 문헌들은 모두 승자(勝者)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그 속에서 公의 덕행(德行)이나 업적, 치적들은 찾아볼 수 없다. 뿐만아니라 公의 아들과 손자들도 유배로 점철된 삶을 사셨으니 후손에게 물려줄 가장(家狀)이나 행장(行狀)도 전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은 현재 전해오고 있는 기록들을 바탕으로 公의 사적(事蹟)을 밝혀 보고자 한다.

  우리 고성이씨는 고려조에 형성된 문벌속에 당당하게 자리매김한 명족(名族)이다. 이는 고려시대 우리 선조들의 혼인관계를 살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公은 이러한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백부께서 시임(時任) 문하시중이요 아버님이 형부상서(刑部尙書)였으니 당세(當世) 최상의 훈도(訓導)를 받으며 성장하였을 것이다. 일찍이 벼슬길에 진출하여 공민왕 때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시고 우왕이 즉위하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 하셨다. 우왕 4년(1378) 9월에 왜적이 철주를 침범하고 익주와 공주로 진출하니 公을 전라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삼아 이를 소탕하게 하였다. 이는 公이 단순한 문사(文士)가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큰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왕 5년(1379) 왕이 公의 딸을 맞아 근비(謹妃)로 책봉하고 公을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어머니 성주이씨를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부인 홍씨를 변한국대부인으로 각각 봉하니 일문의 영화가 극에 이르렀다. 우왕 14년(1388) 최영을 문하시중 겸 8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대군을 일으켜 요동정벌의 길에 올랐으나 이성계의 배반으로 3월에 평양을 출발한 좌,우군이 5월에야 위화도에 도착하여 일시 주둔하였다가 회군하니 이것이 우리 역사상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며,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민족의 발상지인 요동을 수복하려는 웅대한 꿈은 영원히 소멸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성계는 우왕은 왕씨의 혈통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하니 公은 당시 명망높은 유학자 이색, 조민수 등과 의논하고 근비(謹妃)의 소생인 창(昌)을 왕으로 세웠다.
  창왕 원년(1389) 왕은 公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삼고 이색, 이성계, 이림 3명에게 신하로서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로 궁전에 오르고 조견(朝見) 할 때 절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고하지 않는 특전을 내리고 은 50량과 비단 10필, 말 1필을 각각 하사하셨다.

  그러나 그해 11월 정축일에 이성계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심덕부, 찬성사(贊成事) 지용기와 정몽주, 정당문학(政堂文學) 계장수, 평리(評理) 성석린,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조준, 판자혜부사(判慈蕙府事) 박위, 밀직부사(密直副使) 정도전과 함께 흥국사에 모여 대병의 호위를 받으면서 의논하기를 “우왕과 창왕은 본래
왕씨가 아니다. 그러므로 종묘의 제사를 받들 수 없다. 또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우라는 명나라 천자의 명령이 있었다. 정창군(定昌君) 요(瑤)는 신종(神宗, 1198~1205)의 7대손으로 그 족속이 가장 가까우므로 그를 세워야 한다” 하고 왕요를 수창궁에서 옹립하니 이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전 대호군 김저와 전 부령 정득후가 가만히 황려부(黃驪府)로 가서 우왕을 찾아뵈니 우황이 “내가 울적해서 못 견디겠다. 이대로 손곱고 여기서 기다릴 수야 있느냐? 다만 장사 한명만 얻어서 이시중(이성계)을 죽이면 내일이 뜻대로 되겠다. 내가 평소부터 예의판서 곽충보와 친하니 그를 만나서 의논하라” 고 하였다. 그리고 칼 한자루를 주면서 “이번 팔관회 날에 거사하라. 성사되면 부귀를 같이 하겠다”라고 하였다. 김저가 곽충보에게 우왕의 말을 전하니 곽충보가 그 자리에서는 거짓으로 승낙하고 곧 이성계에게 밀고하였다.    이성계는 팔관회에 참석하지 않고 집에 있었는데 그날 밤에 김저와 정득후가 이성계의 집에 잠입하였으나 문객(門客) 들에게 붙잡힌바 되어 정득후는 자결하고 김저는 순군옥에 투옥되어 대간들의 심문을 받았다. 김저가 “변안열, 이림, 우현보, 우인열 등과 공모하고 여흥에서 상왕을 영접하는데 내응(內應)하는 임무를 분담하였다”고 고백하자 그들은 모두 먼곳으로 유배하고 우왕을 강릉으로, 창왕을 강화로 추방하고 서민으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公의 아들 귀생(貴生), 사위 유염(柳琰)과 최렴, 외손녀사위 노귀산(盧龜山), 조카 근(懃)까지도 먼 곳에 부처되니, 이때부터 公의 일가는 영화를 뒤로하고 형극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공양왕 2년(1390) 2월 왕의 생일을 맞아 모든 죄수들을 방면하였으나 公을 비롯하여 이색, 조민수, 권근 등은 방면하지 않았으며 4윌에는 公을 철원으로, 아들은 고성으로 이배(移配)하였다. 5월 1일 명나라에 갔었던 왕방과 조반이 돌아와 왕에게 말하기를 “명나라 예부(禮部)에서 저희를 불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 사람 윤이와 이초가 와서 황제에게 이시중(이성계)이 요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는데 요는 왕족이 아니고 인척(姻戚)일 따름이다. 그리고 요는 이시중과 함께 중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이를 반대하는 재상 이색 등 10여명을 죽이고 우현보 등 9인을 먼 곳으로 귀양보냈습니다. 그래서 귀양가 있는 재상들이 우리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황제께 고하는 바이니 친왕이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윤이.이초 등이 기록한 이색 등의 성명을 내어 보이면서 ”너희가 속히 돌아가 왕과 재상들에게 말하여 이 사람들을 잡아다 물어보고 나에게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고변하였다. 이 고변으로 우현보, 권중화 등을 순군옥에 가두고 최공철 등 11인을 옥에 가두었으며 이색, 이림, 우인열, 정지, 이숭인, 권근, 이귀생 등은 청주 감옥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그러나 청주에 큰 홍수가 있었고 민심 또한 흉흉하자 왕은 교서(敎書)를 내려 이미 죄를 자백한 자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각처에 안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때의 사실(史實)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양왕이 즉위하게 되자 대간에서 탄핵하기를 권근이 사사로이 자문(咨文, 중국과 왕래하는 문서)을 뜯어서 먼저 이림(李琳)에게 보였으니 이는 이성(異姓)을 편든 것이라고 논죄하여 영해로 유배시켰다. 경오년 봄에 대간에서 다시 논핵(論劾)하여 극 형에 처하려고 하였으나 이성계가 구원하여 줌에 힘입어 장(杖)을 맞고 흥해로 양이(量移, 형량을 감형하여 가까운 유배지로 옮기는 것) 되었다. 그 해 여름에 이색 등 여러 폄소(貶所, 유배지)에 있던 자가 모두 청주의 감옥으로 잡혀 와서 갇혔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큰 비가 내려 물이 넘쳐 성안으로 들어와서 관청이 모두 물에 잠기었다. 여러 문사관(問事官) 들이 나무위로 기어 올라가 물을 피하였으므로 갇힌 자들이 모두 달아나 피하였다. 그해 11윌에는 公의 부자를 방면하여 지방에 임의로 거주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公의 고매(高邁)한 인품과 충성심에 감복한 백성들의 소요를 막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양왕 3년 (1391) 5윌 공께서는 이성계 일파인 허응의 상소로 말미암아 다시 충주로 유배되어 6월 24일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묘는 충주 경제원 남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전되었다.

  공의 9대손인 창주공(滄洲公 휘 成吉)의 후손 문중에서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명산리 화암하에 양위를 합설하고 단향을 모셔오다가 1999년 12월 도촌공파 종중에서 公의 찬연(燦然)한 사적(事蹟)과 숭고한 충절 을 만 천하에 알리어 세인의 귀감이 되게 하고자하여 성금을 모아 고성 금봉재 서편에 사적비를 세우고 그 옆에 단소를 마련하여 향화를 받들고 있다.
  배위는 변한국부인 남양홍씨 이시고, 장남은 상호군(上護軍) 귀생(貴生) 이시고 2자는 밀직사사(密直司事) 무생(茂生) 이시다.
  시중공에 관련된 사적들은 고려사 제116권, 열전 제29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최근에는 여주 이우성이 지은 고려문하시중 철성부원군이림사적비문에 다음과 같은 명시(銘詩)가 수록되어 있다.
 
      “벌열지구(罰閱之舊)로서 검소지덕(儉素之德)이 있고
      훈척지귀(勳戚之貴)로서 수절지용(修節之容)이 있으며
      위망지숭(位望之崇)으로 겸공지지(謙恭之志)가 있었다.
      이것은 고려왕정의 전교(傳敎)에서 公을 평한 말이다.
      후세인이 다시 그 무엇을 보태리오. 
      아아 검소하고 겸공한 公의 일생,
      천백세 후손에게 길이 길이 그 음덕(陰德) 끼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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