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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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世 | 용헌공(容幹公) 휘 원(原) (1368-1429)(용헌종중 중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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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종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3-19 21:17 조회7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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杏村公의 넷째 아드님이신 평재공 휘 강의 외아드님으로 공민왕 17년(1368) 1월 15일에 나시었으며 字는 차산(次山), 호는 容軒이시며 시호는 양헌(襄憲) 이시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훈봉되시었으며 동덕좌명공신(同德佐命功臣) 이시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되었다.
  公께서 출생하신지 4개월만에 아버님 평재공께서 세상을 떠나시어 자형이신 양촌(陽村) 권근(權近, 시호 文忠, 조선시대 학자, 大提學) 선생께서 친자식처럼 가르치시었는데 재주가 뛰어나 15세(1382)에 성균관 이승상 문하에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8세 때인 1385년에 포은 정몽주선생 문하에서 문과에 급제하시니 정몽주선생께서 감탄하시며「文敬公(平齋公) 휘 강(岡)의 훌륭한 재덕(才德)이 빛을 보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시더니 이처럼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니 하늘이 아마도 그 뜻을 알고 내렸는가 보다」하시였다. 공조(工曹)와 예조(禮曹)의 좌랑(佐郞, 정6품)과 병조 정랑(正郞, 정5품)을 거쳐 공양왕 2년(1390)에는 사헌부(司 憲府)의 지평(持平, 사정담당관서의 정5품)이 되시었다. 1392년 7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公의 어질고 뛰어난 인재로 인정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관서인 대각춘방(臺閣春坊)의 시험관격인 시관(試官)을 맏기시니 한결같이 강직하고 정당하게만 집행함으로 조선 태조 6년(1397) 현 경기도 양주 양근(양평) 고을 부사 (府使)를 제수(除授)하니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칭송을 받으셨다.

  다시 종3품인 전교(典校)로 승진하시고 문한(文翰)을 맡으시어 명성이 높으셨다. 태조 7년(1398) 8월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태종에 즉위하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되었으며 수성협찬구근호조익대좌명훈(輸誠協贊久勤護調翊戴佐命勳)을 받으시고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다. 그리고 태종이 公을 중요한 직책에 골라 앉히시니 더욱 정성을 다하셨으며 이어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과 집현전 제학(集賢殿 提學, 정2품)을 거쳐 태종2년(1402)에 경기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가시어 예성강 벽난(碧灡) 나루에 식파정(息波亭, 식파란 강을 건너가는 사람의 근심걱정을 없게한다는 뜻)을 세워 도강사고(渡江事故) 방지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태종 3년(1403) 2월에 내직(內職)으로 돌아와 부제학(副提學)이 되셨다가 4월에 명나라 연경(燕京)에 고명(誥命)을 받으러 가시어 9월 9일에 귀국하시고 청화정(淸和亭) 환영잔치에서 명나라에서 얻은 통감강목 (通鑑鋼目), 십팔사략(十八史略), 용화(龍畵, 용을 그린 그림), 족자화(簇子畵)와 전안감(氈鞍龕, 천에 그린 그림 안장)을 태종에게 바쳤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나가셨는데 당시 평양은 어지러운 민심으로 치안이 매우 불안하였으나 公께서 선정(善政) 하시어 대동관(大同館) 중수(重修)에 백성들의 자발적 협조를 유도하여 용이하게 마쳤다한다. 다음 해 평양부윤으로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 都巡問察理使, 민정을 살피고 해결하는 특사)를 겸직하셨다가 1406년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이 되시고 다시 중군총제참지의정부사 겸 총판의용순금사(中軍摠制叅知議政府事 兼 摠判義勇巡禁司, 군사 업무를 조정 통제하는 기관의 총장격)를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시었다가 한성부사로 옮기셨다. 1408년 5월 24일(公 41세 때) 태조대왕이 돌아가시니 빈전도감(殯殿都監)이 되셨다.

  같은 해 7월 경상도관찰사로 나가셨는데 가뭄이 극심하여 公께서 친히 관민을 동원하여 우물을 파니 곧 흡족한 단비가 내려 백성들을 구명하였다고 전하며 이 우물을 가리켜 철이정(鐵李井, 성주 소재)이라 하고 돌뚜껑으로 덮여 있다고 한다.
  태종 9년(1409) 10월 동북면 도순문찰리사(東北面 都巡問察理使)를 지내시고 1413년 영흥부사에 부임하셨다. 1415년에 추충익대좌명공선(推忠翊戴鐵佐命功臣)에 오르시고 예조판서(禮曺判書)가 되셨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셨는데 公이 세번씩이나 사헌부의 장을 맡으시어 국정을 바로잡고 격탁양청(激獨揚淸, 부정부패를 신속히 방지) 하시니 기강이 확립되었다.
  1416년 3월에 다시 한성부사가 되시고 4월에 의정부 참찬(叅贊)이 되셨다가 5월에 병조판서가 되셨으며 6월에 이숙번의 무례한 죄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말 한 필을 상으로 받으셨다. 1417년 5월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가 되시고 보문각 대제학(寶文聞 大提學)을 거쳐 다시 병조, 이조판서와 의정부참찬 (議政府叅贊), 그리고 의정부 찬성(贊成)에 오르셨다.
  1418년 8월 세종대왕이 즉위하시고 우의정이 되시어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과 병조판서를 겸직하시었다. 1415년 상왕전 상수연석(上王殿 上壽宴席)에서 군신이 연구(聯句, 시를 한 구절씩 연속하여 짓는 방법)의 시를 지으신 그 내용은 고성이씨대종회발전사 409면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연석(侍筵席, 대궐안의 큰 잔치)에는 효령대군 보(補), 영돈령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참찬 변계량, 이조판서 정이, 호조판서 최이, 예조판서 허조, 공조판서 맹사성, 병조참판 이명덕, 대사헌 허지, 지신사 하연 및 육대언(六代言)이 참석했다 한다.
  1418년 11월 3일 왕께서 公에게 오매패(烏梅牌)를 하사하시었고 1419년(세종 1년) 정윌 명나라 문제의 고명(誥命)에 대한 세종대왕의 표(表, 친서)를 받는 사절로 명나라 금릉으로 가시었는데 명나라 문제가 公의 뛰어난 풍채를 보시고 황염(黃髥, 누른 수염) 재상이라 하시고 후일 다시 올수 없느냐 하시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한다. 3개월만에 귀국하시고 1420년 3월16일 우의정으로 집현전의 영전사(領殿事)를 겸임하시었고 7월에 정안(定安) 왕후가 돌아가심에 좌의정 박은과 더불어 국장도감의 도제조(都提調)가 되시었다.
  세종 3년(1421) 12월7일 좌의정에 오르시고 이조판서를 겸직하시었다. 1422년 5윌10일 태종이 승하하시니 우의정 정탁과 더불어 국장도감 도제조(都提調)가 되시었으며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노비제도의 개선, 불충불경한 관료의 탄핵상소, 왕실의 여러 가지 행사의 합리적인 개선 및 농업진흥과 초범자에 대한 관용 등 많은 업적과 공적을 남기시여 명성이 높았으나 이를 시기하여 비방하고 무고하는 무리들이 태종왕 때부터 여러차례 모함하니 끝내 세종 8년(1426) 公이 59세 되시던 해 봄 전라도 여산 유배지에 자원 안치되시었다.

  세종 11년(1429) 6월19일 여산에서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62세이시었다. 동년 9윌17일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율리 가차곡(현 성남시 도촌동 산83번지)에 장례를 뫼셨다.
  세조 2년(1456) 7윌에는 귀양 가실 때 회수당했던 공신록권(功臣錄券)과 일체의 직첩(職牒)을 다시 하사받고 시호를 양헌(襄憲)으로 받으셨다. 또 태종묘정에 배향하게 하고, 왕명으로 자손들이 대대로 불천위(不遷位, 또는 不祧廟, 영구히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라는 것)로 하라고 하시었다.
  성종 6년(1475)에 문집을 간행하였고 명종 15년(1560)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정조14년(1790) 8월에 청도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봉안하였다가 헌종 3년(1837)에 안동 명호서원(明湖書院)으로 옮겨 모셨는데 고종 8년(1871)에 서원이 철폐됨에 따라 명호단소(明湖壇所)로 개칭하여 매년 9월 중정일(中丁日)에 봉향하고 있다. 그 후 명호단소는 퇴락(頹落, 낡고 허물어 짐)되고 주방건물만이 남아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이건한 도곡재(陶谷齋, 안동군 예안면 도곡동)를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아 명호단소의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명호단소 건물을 도곡재로 이건하는 등 두 집을 바꾸어 1974년 12월 31일 완공하였다. 불천위 대묘(大廟)는 약 300년전부터 청도군 매전면 명대에 모시고 매년 음력 6월 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정부의 분당지구 개발로 묘지가 수용되어 1990년 9월 24일 경기도 광주시 목동 산113번지로 천묘하고 묘전 석의물도 갖추고 광모재(廣幕齋)도 이건하여 수호관리하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목동 산113번지이고 신도비(神道碑)는 1560년 건립된 것을 1990년 9월 광주시 목동으로 이건하였으며, 사가 서거정(四佳 徐居正)이 글을 짓고, 후손 안광공(安匡公) 명규(名珪)가 쓰고, 후손 우당공(雨堂公) 택(澤)이 전자체(篆字体)로 새겼다. 묘비는 1991년 가을에 건립했으며 문학박사 여주 이우성(李佑成)이 짓고, 전면은 안동 김충현(金忠顯)이 쓰고, 음기(陰記)는 후손 동익(東益)이 썼다.
  배위는 진한국부인 양천허씨(辰韓國大夫人 陽川許氏, 묘는 양주 덕수동이라 하나 실전후 광주 목리에 합폄)와 변한국대부인 전주최씨(弁韓國大夫人 全州崔氏, 묘는 府君墓와 雙墳) 이시다.
  자녀로는 장자에 대(臺, 鈍齋公派 派祖), 2자에 곡(谷, 護軍公派 派祖), 3자에 질(垤, 左尹公派 派祖), 4자에 비(埤, 同樞公派 派祖), 5자에 장(場, 兵使公派 派祖), 6자에 증(增, 叅判公派 派祖), 7자에 지(墀, 思菴公派 派祖) 이시며, 1녀는 유방선(柳方善, 主簿),  2녀는 유급(柳汲, 副正), 3녀는 윤삼산(尹三山, 贈 領相, 손녀는 성종왕비 貞顯王后). 4녀는 이굉직(李宏稙, 贈 吏判), 5녀는 권람(權擊, 左相, 그 사위는 南怡將軍), 6녀는 황종형(黃從兄, 副正, 領相 黃喜의 손자) 이시다.

  용헌공에 관한 문적(文蹟)은 1560년 사가 서거정(徐巨正)공이 지은 신도비문, 1992년 여주 이우성(李佑成)공이 지은 묘비문, 1475년 영경연춘추판사 정인지(鄭麟趾)공이 지은 용헌문집 서문 등이고, 신도비에 새겨진 명시(銘詩)는 다음과 같다. 
   
      당당한 철성이시여, 밝은 공훈이 빛나도다.
      의정부에서 맑고 맑았으니 인각(忠勳府)에서 우뚝하고 우뚝했네,
      여려 대를 이어 살아온 분들의 그 공이 산기슭에 드리웠네,
      사람들에게는 모범이 되었고 나라에는 든든한 기둥이었네
      조물주는 어찌하여 사람을 희롱하는고
      어떤 이는 기이하고 어떤 이는 둔한고, 
      황각(黃閣, 의정부의 별칭) 주작(朱雀, 엄한 곳을 가리킴)에 쇠파리가 창궐하네
      공은 흰옥 같아 혐의가 없었으니 태연자약하게 처신했네
      왕은 공을 생각한다 말하나 공은 빨리 돌아오지 못했네. 
      공이 돌아와서 다시 정승이 되어야하나 하늘은 어찌하여 급히 빼앗아 갔는가.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남아있는 바가 길고
      산 물띠 같으니 공께서는 죽지 않았도다.
      옥 같이 아름답게 일어서고 난초 싹 돋아나듯 자손은 번창하리라.
      넓은 무덤의 높고 높음이여. 넓은 물의 흐르고 흐름이여
      입석하여 영원하리라 공의 무덤이여,

      銘曰
      堂堂鐵城有炳勳烈  相府潭潭麟閣屹屹  久宅百揆功存納麓  人有蓍龜國有柱石  造物者何戱劇於人
      何數之奇何亨之屯  黃閣朱崖蒼蠅白壁  公則不嫌公處自若  王曰念公公歸不日  公歸復相天套何急
      雖則云然所存者長  山礪河滯公則不亡  玉立蘭茁子孫其昌  廣陵峩峩廣水沄沄  立石不朽維公之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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